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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은 왜 CBS 뉴스를 죽이려 했나?

    [CBS 보도부활 30주년①] 전두환, 광주 그리고 CBS

    (사진=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CBS 로고가 찍힌 차량이 광주 시민들 사이에 놓여 있다. 당시 CBS 차량에는 광주 CBS 노병유 기자가 있었다.)

     

    올해는 CBS가 1980년 신 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보도기능을 박탈당했다가 1987년 민주항쟁과 함께 보도기능을 되찾은 지 30년이 되는 해다. CBS는 이를 기념해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편집자]

    영화 '택시운전사'의 배경이 됐던 1980년 5월 광주에는 700여 명의 택시기사가 있었다.

    광주시내 도로 곳곳을 누비며 누구보다 계엄군의 잔인한 폭력상을 생생하게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격담은 승객들은 물론 택시운전사들 특유의 구전망을 통해 다른 동료 택시운전사들에게 퍼져나갔다.

    영화에서처럼 왜 하필 택시 기사들이 광주항쟁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됐는지 설명되는 요소들이다.

    버스터미널과 광주역 등에서 계엄군의 방망이와 군홧발에 무참히 피 흘리는 시민들을 본 택시기사들은 5월 20일 마침내 행동에 돌입한다.

    택시 200여 대가 도청에 집결한 것이다.

    그들은 계엄군의 공격에 맞설 방어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일터이자 돈벌이 수단이던 택시를 기꺼이 저항에 헌납했다.

    택시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계엄군의 폭압에 광주시민들이 더욱 적극적인 저항에 나서게 만든 계기가 됐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광주 택시기사들이 접한 언론 보도는 영화 ‘택시운전사’ 속 황태술(유해진 분)의 대사처럼 거짓 말뿐이었다.

    (사진=오른쪽 위 의사 복장을 한 사람이 5·18 당시 광주 CBS 노병유 기자의 모습. 계엄군의 구타와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시민을 계엄군의 눈을 피해 후송하기 위해 의사 복장을 착용했다. 노병유 기자는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으며 이후 광주·전남 지역 언론인 중 최초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영화에서는 황태술이 “오늘만 해도 몇이 죽었는데, 뉴스가 쩌래 거짓말을 해도 되는 것이여”라며 수차례 폭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영화처럼 당시 언론 보도는 광주의 현실을 왜곡하거나 감추기 바빴다.

    계엄군에 의한 광주 시민들에 대한 부상과 사망 실태는 축소 보도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이 전남도청에 상주해있던 보안사 검열관실을 찾아 기사검열을 받은 뒤에야 보도했기 때문이다.

    집회나 시위 등의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기사는 보도되지 못하거나 보안사 직원에 의해 철저히 난도질된 채 전달됐다.

    ◇ “CBS는 보안사 보도 지침 따르지 않아”

    하지만 CBS는 달랐다. 보안사 직원들이 허락해준 대로만 방송하지 않았다.

    당시 광주 CBS 기자로 활동했던 노병유 씨는 "전남대 학생 2만 명이 집회에 나섰다고 기사를 써서 도청으로 가면 보안사에서 200명으로 고쳤다"며 "우리는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와 2만 명이라고 수정해 보도하는 식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랬기에 CBS에 대한 군부의 탄압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졌다. CBS에 대한 실시간으로 뉴스 모니터링을 진행했던 군부는 자신들이 허락한 대로 방송하지 않으면 기자와 데스크의 사상이 불순하다는 내용 등이 담긴 공문을 CBS 사측에 통보해오곤 했다.

    보도가 일부 막히자 CBS 기자들은 다른 길을 택하기도 했다. 다른 기자들과 연대해 비상계엄철폐 운동에 앞장섰다.

    노병유 기자도 80년 5월 16일 저녁 7시 광주 전남지역 60여 명의 언론인 양심선언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같은 해 8월 해직됐다.

    당시 서울 본사 기자로 활동했던 송정민 기자는 “정권의 언론탄압 강도와 CBS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는 비례했다”며 “CBS에 보도한 뒤에야 사실이라고 믿는 청취자들도 많았다”라고 말했다.

    ◇ “택시기사들이 많이 들었던 CBS, 승객들에게도 영향”

    다른 언론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했던 CBS의 정론직필은 당시 택시기사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18 당시 광주에서 택시 기사로 일했던 장훈명 씨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CBS 시사 프로그램 등을 많이 믿고 들었다"며 "택시 기사들이 CBS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택시 기사들의 소개로 CBS를 듣게 된 시민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사진=5·18 당시 광주 기독교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부상당한 광주 시민들을 치료했던 안성례 여사가 1980년 5월 사진들을 보며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광주 기독교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부상당한 광주 시민들을 치료했던 안성례 씨에게도 CBS는 전두환 군부에 맞선 유일한 방송국으로 기억된다.

    안성례 여사는 "CBS는 너무도 참담했던 광주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가장 노력한 언론사였다"며 "당시 CBS만 제대로 된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보도 기능을 빼앗기는 등 가장 큰 탄압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 씨는 “80년 CBS는 광주에 마지막으로 남은 촛불로 비유할 수 있다”며 “CBS는 그 마지막 촛불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사진=1980년 4월 사북사태 당시 광산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을 점거하고 있다. 사북사태 당시 CBS 고희범 기자는 현장 가장 가까이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 등에 대해 보도했다.)

     

    CBS는 광주 민주항쟁뿐 아니라 광부들이 벌인 노동 항쟁인 사북사태 등 노동문제를 다루는데도 가장 앞장섰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만나주지 않았던 노동단체 간부들은 명동성당이나 경찰서 유치장 등에서 CBS 기자를 만나 취재에 응했다.

    CBS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보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CBS는 정권이 불편해했던 해외의 혁명이나 군사쿠데타에 대해서도 보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독재에 맞선 언론자유의 전통을 이어온 덕분이기도 했다.

    (사진=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1996년 5·18과 관련해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섰다. )

     

    이 때문에 CBS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에게도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 전두환, 결국 80년 11월 CBS 보도 기능 빼앗아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은 결국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의 일환으로 CBS의 보도와 광고 기능을 빼앗는다.

    CBS를 뉴스 보도를 할 수 없는 방송국으로 만든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종교 방송'은 종교 관련 내용만 편성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CBS는 1954년 창사 이래 줄곧 종합 편성을 해온 일반 방송사인 사실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CBS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전남대 사학과 이홍길 명예교수는 "할 말을 하는 언론사였던 CBS가 전두환 정권이 보기에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현실을 왜곡하거나 보도하지 않는 다른 언론사와 CBS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CBS는 198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30분 낮 뉴스를 마지막으로 보도 기능을 빼앗기게 된다.

    당시 눈물을 훔치며 마지막 뉴스를 방송했던 장미영 아나운서는 "그동안의 CBS의 보도가 한국 언론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할 것으로 믿는다"며 울먹이며 고별 방송을 했다.


    이날 기자 61명 등 170여 명은 하루아침에 친정을 등지고 KBS 등으로 강제 전출되는 아픔을 겪게 됐으며 보도국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려야 했다.


    보도라는 팔다리가 잘린 CBS는 이후 기독교 관련 내용과 음악만 전할 수 있는 방송국이 됐으며 87년 6월 항쟁 이후 보도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 힘든 7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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