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혁명 때 국민들이 CBS 틀면 4.19 소식 들을 수 있었죠'
- '아무래도 내일은 감옥 갈 것 같으니 사식 넣을 준비해달라'
- 구약성서 속' 왜곡된 역사 그냥 둘 수 없다' 예언자적 사명 강조
- 할머니들이 허리춤에서 꼬깃한 돈 꺼내 헌금…책임감 느껴
- CBS 구성원들, '뉴스는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공감대 있었다
- 국민들의 믿음과 성원이 보도 부활 이끌었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19:55)
■ 방송일 : 2017년 10월 19일 (목)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강대인 미디어시민모임 이사장, 황우선 교수(대덕대), 변상욱 대기자(CBS)
▶▷ CBS뉴스 부활 30주년 특집 좌담 'CBS 저널리즘과 한국의 민주주의' ①에서 이어집니다.
◇ 정관용> 우리 황우선 교수께서는 6~70년대 그리고 87년 이전까지 한국 언론에서 CBS의 위상이랄까 역할이랄까 그것 좀 정리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 황우선> 창립 이후로 박정희 정권 시절이나 또 전두환 정권 시절에 꾸준히 CBS가 양심의 목소리 또 진실보도를 꾸준히 해 왔고요. 특별히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또 언론으로서는 더 없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언론인으로서는 첫 번째 구속 사건이 조성호 PD, 우리 CBS PD가 구속이 됐죠. 그래서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이 돼서 징역을 6개월이나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당시 오재경 사장 임기였었는데 당국에서는 당연히 즉각 해고하라고 이렇게 통보를 했고요.
그런데 오재경 사장께서는 CBS 사장 이전에 자유당 정권 시절과 또 박정희 정권 시절에 한동안 공보 관련 장관을 역임하셨죠. 그러시면서 상당히 입바른 소리를 잘하시고 굉장히 강직하셨기 때문에 물러나신 상황이신데 그분이 사장이시면서 조성호 PD를 해고하라고 통보받았을 때 조 PD를 불러서 그만두라고 얘기한 게 아니라 더 열심히 해라, 이렇게 격려를 하셨다 그래요. 그래서 또 그에 앞서서 감의도 선교사님, 창립자이신데 그분은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시에 방송이라고는 2개밖에 없는데 국영방송과 CBS인데. 국영방송에서는 현장 취재를 할 수가 없잖아요.
◇ 정관용> 못하죠. 안 하죠, 안 하죠.
◆ 황우선> 그때 이제 당시에 CBS에 보도국도 없었고 기자도 없었는데 감의도 사장께서 전체 직원들 성우, 국회의원들 이런 직원들까지 다 포함해서 다 현장에 보내서 취재하게 하시고 또 그걸 가지고 보도하게 해서 국민들이 궁금한 것을 그렇게 전하게 하고.
◇ 정관용> 4. 19혁명의 현장 보도?
◆ 황우선> 그래서 당시에 국민들이 CBS 다이얼을 돌리면 4. 19 소식을 알게 됐던 거죠. 그런데 저는 이 CBS가 이러한 양심의 소리를 또 진실 보도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데는 초창기에 이런 감의도 선교사나 또 오재경 사장 같은 분들의 어떤 경영인으로서의 그런 철학, 아주 저널리즘 철학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뿌리가 됐다고 봅니다. 특별히 감의도 사장의 성품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 것이요. 그분이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대를 이어서 선교사로 왔는데 그때 청주에서 사역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설교를 하는데 당시에는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시기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주일 설교에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게 발각이 돼서 일경에 체포가 됐고요. 붙잡혀갔죠. 그때가 본인으로서는 굉장히 젊은 시절이고 또 신혼 초기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기록에 보니까 한겨울인데 맨발이었어요. 법정에 섰는데. 또 포승줄로 묶였고요. 죄수복을 입고 결국 징역 5개월을 살고 미국으로 쫓겨났습니다.
한마디로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다, 당시에 일제로부터 굉장히 많은 압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 개의치 않고.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기도 하고 또 저는 세계시민주의 정신이 기초가 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정의로운 분들이 또 오재경 사장의 어떤 언론에 대한 투철한 그런 정신 이런 것이 기초가 돼서 CBS가 출발부터 그런 공정한 보도, 진실 보도가 가능했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우리 강대인 이사장님, 변상욱 대기자 입사했을 때 또 선배들한테 이런저런 전설을 듣기도 하고 무슨 교육도 받고 그러잖아요. 딱 들어오면 그런 교육이 있었어요? 여기는 이런 곳이다. 뭐라고 그래요?
◆ 강대인> 그런 교육이 딱히 있었다기보다는 분위기 자체가, 그러니까 항상 비판적인 그런 언론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하지 않고서는 CBS에서 생존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그것은 보도국이나 편성국이나 동일한 분위기였고요. 그래서 이제 보도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뉴스프로그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 이제 조금 전에 황 교수도 말씀하셨지만 CBS가 처음에 1954년에 뉴스프로그램을 했지만 그 당시에 뉴스 기능이 어떻게 하냐 하면 KBS뉴스를 15분씩 받아서 냈어요.
◇ 정관용> 처음에는?
미디어시민모임 강대인 이사장 (사진=시사자키)
◆ 강대인> 네, 처음에. 그러다가 57년부터는 어떻게 하게 되냐 하면 VOA뉴스, 미국의 소리방송을 중계하게 되는데.
◇ 정관용>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 강대인> 네.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미국의 소리 방송이 그 당시에 여러 국제적인 그런 시각이나 또는 한반도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아주 개방적인 시각들이 전달되어지는 창구였기 때문에 그 CBS뉴스가 상당히 관심들을 갖는 그런 영역이 돼버렸고요. 그리고 1958년에 가서 동화통신사와 계약을 맺어서 하루에 5번씩 자체 뉴스를 시작을 합니다.
◇ 정관용> 58년.
◆ 강대인> 기자라는 직함은 없었지만 뉴스통신사로부터 제공받아 자체 뉴스를 진행해 왔고 그것이 이제 조금 전에 황 교수 말씀하신 대로 1960년 3월 15일 김주열 군 3. 15 부정선거에서부터 그 사건의 연결로 이제 4. 19가 일어나는 거니까 그 모든 과정이 CBS뉴스가 사회 지식인들이나 엘리트 계층들의 관심을 끄는 그런 분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래서 그런 문맥들이 기자건 PD건 간에 모든 사람이 공유했던 분위기였다. 이렇게 볼 수 있고 특히 편성국 쪽에서는 여러 가지 그런 아까 우리 변상욱 대기자 얘기하셨지만 CBS 논단과 같은 CBS 교양강좌, CBS 칼럼이라든지 또 ‘오늘을 진단한다’라는 프로그램이라든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사적인 토픽을 가지고 심층 보도해 나가는 그런 것들이 아주 일반적인 그런 방송계 분위기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정관용> 군부정권,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렇던 시절에 끊임없이 사고를 쳤다는 얘기는 직원들은 항상 뭔가 좀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그랬어요, 어땠어요?
◆ 변상욱>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집에 퇴근할 때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를 뱅뱅 돌죠. 시커먼 지프차가 동네에 서 있으면 회사로 가서 자고.
◇ 정관용> 집에 안 들어가고.
◆ 변상욱> 집에 안 들어가고 그런 경우도 있었고. 조금 큰 사고가 나면 집에 전화 걸어서 아무래도 내일은 다녀와야 될 것 같다. 감옥에 가 있어야 될 것 같으니까 솜바지라도 준비해서 사식 넣을 준비를 해 달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다행히 또. 좋은 회사죠,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럴 때마다 아까 조성호 PD 얘기도 나왔지만 살살 또 옆으로 돌려서 다른 곳에 숨겨서 보호하기도 하고 하면서 여지껏 견뎌왔고 강 이사장님 말씀의 뒤를 잇자면 80년대 분위기는 거기에 새로운 것이 더해집니다. 왜냐하면 다른 파트가 다 없어지고 선교 파트만 남게 된 거잖아요, 프로그램에서. 그런데 그 와중에서 어떤 거냐 하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적인 사명. 시대와 민족을 올바르게 해서 하나님 앞에 내놔야만 된다, 이 역사를 순결한 걸로 만들어야지 어두운 역사를, 왜곡된 역사를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어떤 예언자적인 사명을 더 강조하는 이제 신앙적인 분위기도 확 일어나고.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할머니들이 예를 들면 허리춤에서 꼬깃꼬깃 접은 돈을, 지폐를 꺼내서 헌금을 하고 가시고 하는 광경을 보면 시민과 민중에 대한 책임 같은 게 안 일어날 수가 없죠. 그래서 그런 것들 그러니까 신앙적인 동질감도 훨씬 강했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지금 CBS뉴스 부활 30주년 특집 좌담 ‘CBS 저널리즘과 한국의 민주주의’ 함께 듣고 계신데요. 너무 우리가 자화자찬만 하는 것 같은 감이 갑자기 듭니다. 뉴스 부활된 이후 30년. 저희가 하느라고 했습니다마는 잘 못한 것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얘기 조금 있다 뒤에 좀 더 나누도록 하고 이왕 자화자찬 분위기 간 김에 문자로 참 많은 분들이 저희 칭찬도 해 주시니까요.
별빛세상 님, CBS 감사합니다. 정말 어둡던 시절 소금이었습니다. 이미란 님, 민주주의라는 말씀에 울컥해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네요. 송광섭 님, 한국언론에서 CBS가 가장 공신력 있고 믿음직한 전파언론입니다. 5367번 쓰시는 분. 금년 63세 전직 은행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CBS 사랑하는 애청자입니다. 보도 기능 회복되었을 때 그 감격 잊지 못합니다. 이선우 님,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이끌어온 방송이었군요. 청취자로서 뿌듯합니다. 1202번님. 정관용, 김현정 프로그램 애청자로서 어떻게 해서 이런 좋은 방송을 들을 수 있는가를 알게 됐습니다. 또 이원준 씨 등 많은 분들이 저도 종교는 아니지만 CBS뉴스와 시사프로그램만 듣습니다. CBS뉴스 부활 30주년 축하드립니다. 저희 청취자들이 축하받을 일이죠.
이렇게 또 칭찬의 말씀들 많이 보내주고 계십니다. 87년에 아마도 6월 항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겠죠. CBS뉴스 보도기능을 다시 줄 수밖에 없었던. 그 과정을 또 변상욱 대기자님?
◆ 변상욱> 83년쯤부터 묘한 일이 벌어지는데 국민들 사이에서 언론이 왜 이 모양이야라는 비판적인 여론이 슬금슬금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아마 영화 택시 운전사, 어떻게 된 건지 광주에서 찍은 그 독일 기자의 비디오테이프가 몰래몰래 세상에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골방에 모여서 그걸 함께 시청하고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속고 있었고 우리를 속인 것은 물론 군부정권이겠지만 군부정권에 유착돼 있는 언론사들이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이제 반성과 분노가 일면서 KBS 시청료 거부운동이라는 게 벌어지죠.
◇ 정관용> 맞아요, 맞아요.
◆ 변상욱> 그러면서 한쪽에는 KBS에 대한 거부운동인데 한쪽에 보니까 CBS가 그때는 이제 기능을 정상화돼야 된다고 몸부림치기 시작하기 시작하니까 ‘그래, CBS뉴스 같은 걸 살려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운동이 또 이제 벌어지면서 두 개가 어떤 복선을 그리면서 얽히면서 같이 발전해 나가죠.
그래서 CBS 기능 정상화운동은 국회 청원운동으로. 국회 청원운동에서 다시 범국민서명운동으로 가고. KBS 시청료 거부운동은 시청료 거부운동 플러스 시청 거부운동으로 발전해 가고 그러면서 86년, 87년으로 확 국민들을 이제 갖다가 몰고 가죠. 그러면서 맨 처음에 ‘권인숙 씨 성고문 사건’ 거기에서 분노가 터지고 ‘박종철 씨 고문치사사건’에서 분노가 터지고 ‘이한열 사망사건’에서 분노가 터지고 하면서 6월 항쟁으로 가는 거죠.
◇ 정관용> 그 중간에 또 아마 80년에 집단 해고당했던 해직 언론인들의 어떤 모임, 해직 언론인들의 투쟁 이런 것도 또 있었고요?
◆ 강대인> 그러니까 이제 1980년대에 대량 해직된 언론인들이 언론운동협의회라는 걸 만들게 되고요. 거기에 기관지 성격으로 <말>지라고 하는 게 이제 출현을 하게 되는데 <말>지가 그간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것들, 특히 보도지침 문제를 폭로한다든지 이런 일들이 민주언론의 필요성들을 절감하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가게 되고.
조금 전 변상욱 대기자 말씀하신 대로 KBS 시청료 거부운동이라고 하는 게 처음에는 이렇게 종교기관에서 출발한 YMCA라든지 이런 데서부터 아주 조그맣게 시작했지만 그것이 85년, 86년 오면서부터 아주 거대한 물결로 가게 되면서 사회 변혁을 추동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그런 분위기로 가게 되는 거죠.
그게 가장 극적인 전기가 저는 80년 4월 13일에 전두환 씨가 4. 13 호헌조치라는 걸 발표합니다. 저도 사실 그때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호헌조치에 대한 걸 비판하는 글을 쓰고 아까 변 기자처럼 저도 다음 날은 아마 어쩌면 감옥에 가 있을지 모른다고 그랬는데 다행히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마는. (웃음)
◇ 정관용> 그때는 전국 대학 교수님들이 호헌 반대 시위에 다 나섰었어요.
◆ 강대인> 다 나섰고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때 민주화 교수협의회 제가 창립 멤버인데. 그렇게 해서 출범이 됐고 또 각 대학의 대학민주화, 사회민주화를 위해서 교수협의회운동들이 생기게 되고 했는데 그런 것들이 응집되어진 결과가 87년 10월 19일 CBS뉴스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런 건 물론 내부적인 동력과 또 외부적인 조건들과 이런 것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 당시 6. 29선언이 있고 그해 또 대선을 앞두고. 정권 차원에서도 조금 안 달라질 수 없었던 그런 배경도 있다고 봐야죠.
◆ 변상욱> 그렇죠. 80년에 해직된 해직 언론인들이 협의체로 뭉치고 거기에 이제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또 함께 뭉쳐지고.
◇ 정관용> 결합하고.
◆ 변상욱> 그게 <말>지가 생겨나고 <말>지에서 86년 9월이죠, 아마. 보도지침 폭로사건이 뻥 터져나오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속아왔구나라고 국민들이 명확하게 깨우치면서 언론을 그만두면 안 된다 해서 민주화운동의 한 갈래로 언론을 정상화시키는 운동이 확 불이 붙죠.
◇ 정관용> 황 교수님이 좀 정리해 주시면. 뉴스보도 기능의 회복 어떻게 가능했느냐.
대덕대 황우선 교수 (사진=시사자키)
◆ 황우선> 저는 세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첫 번째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CBS의 출발 자체가 인가증에 시사뉴스 보도가 명시돼 있었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어떤 스스로의 정체성에 있어서 뉴스는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와야 한다 하는 그런 공감대가 있었고 요. 또 그렇기 때문에 전체 직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광고기능뿐만 아니라 보도기능 정상화를 위해서 운동을 펼치고 또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각기 호소하면서 당위성을 널리 알렸죠.
그러면서 앞서 우리 변상욱 대기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런 87년에 6. 10항쟁으로 민주화 물결이 절정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성과를 얻어서 보도 부활이라는 제자리를 회복하게 됐고요. 두 번째로는 저는 한국 교회 지원과 협력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뉴스 못하게 하고 사회적 영향력 자체가 거의 사라지는 거죠. 광고 못하게 하고 수익이 대부분 없어지니까 문 닫아야 되는 형편이 되다시피 하는 건데 그때 한국 교회가 각 교단이 모아서 즉각적으로 재정적 후원을 했고요.
물론 그것으로 해서 넉넉할 수도 없고 충분할 수도 없었겠지만 아주 극한 재정위기는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큰 힘이 됐었다. 세 번째로는 방금 이렇게 많은 애청자들이 연락을 주시는데요. 국민들이 CBS는 진실한 뉴스를 보도하는 매체다.
◇ 정관용> 성원, 국민의 성원.
◆ 황우선> 공정한 뉴스 또 신뢰받는 뉴스를 하는 그런 언론사라고 하는 그런 것에 대한 확실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국민적 지지를 받아서 보도 부활이 가능했다.
◇ 정관용> 변상욱 대기자 입사하고 한 4년 지났을 때인데 느낌이 어땠어요. 감격스러웠습니까, 어떻습니까?
(좌) 변상욱 대기자 (우) 대덕대 황우선 교수 (사진=시사자키)
◆ 변상욱> 사실 저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고 뛰어서 일을 마치면 막 탈진하고 또 다음 날 뛰어야 되는데.
◆ 강대인> 우선 취재 인력이 부족했을 테니까.
◆ 변상욱> 기자라고는 어떨 때는 2명, 어떨 때는 저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 정관용> 그랬어요.
◆ 변상욱> 이걸 시대적으로 찬찬히 들여다보고 정리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취재차 타이어에서 타는 냄새가 나도록 뛰고 돌아와서 기사 마감시키고 다음 날 나갈 방송 편집하고 하다 보면 하루가 가는 건데.
◇ 정관용> 그리고 바로바로 기자들도 채용하고 했습니까? 어떻게 됐어요?
◆ 변상욱> 맨 처음에 이제 87년 6. 29선언 나고 한 몇 주 있다가 9월 제 기억으로는 9월 14일 같습니다. 5시간 생방송을 하죠. CBS뉴스 기능을 왜 빨리 회복시키지 않느냐 하면서 5시간 생방송 뒤에 이제 한 6분 30초에 걸친 기승 뉴스, 허가받지 않은. 사실 방송사 허가취소 사항입니다. 이렇게 마구 뉴스를 내보낸다면.
◇ 정관용> 불법 뉴스.
◆ 변상욱> 불법 뉴스를 내보냈고. 바로 스케줄 짰더니 기다리라고 해서 미적미적 기다리라고 그래서 기다리고 그러는 사이에 경영진이 바뀌었죠. 바뀌면서 10월에는 된다라고 해서 기다렸다가 10월 19일날 뉴스를 부활시키고 바로 준비를 해서 11월에 시험공고를 냅니다. 모자란 인원을 채용하기 위해서.
그래서 87년 12월 1일부로 한 30명의 새로운 인원이 들어오고 그다음에 해를 바꾸면서 KBS에 갔던 선배들이 돌아오시고. 그다음에 타 회사에서 특채로 사람들 채우고 해서 7년의 공백을 급히 메우느라고 달렸죠.
◇ 정관용> 그러면서 뉴스가 정상화되고 또 각종 시사프로그램들도 또한 시도 되고. 아마 청취자분들 모르시겠지만 저도 CBS에 처음 방송한 게 88년 그때예요.
◆ 변상욱> 아마 ‘오늘을 생각하며 내일을 생각한다’가 그때 쭉 이어지면서 아마.
◇ 정관용> 그때 그러니까 ‘아침에는 오늘을 생각하며 밤에는 내일을 생각한다’ 해서 15분짜리 두 사람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게 고정 진행자가 아니고 2명을 매일 바꿔가면서 하는데 제가 거기에 처음 출연하기 시작한 거예요.
어떨 때는 제가 약간의 진행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지금은 작고하신 김근태 전 의원, 이부영 전 당의장 이런 재야의 거목들하고 대담을 나누기도 하고 그런 등등의 시도들이 쭉 이어지다가 1990년에 지금 여러분 듣고 계신 ‘시사자키’가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처음 생겼습니다.
◆ 강대인> 그렇게 됐습니다.
◆ 변상욱> 월요특집을 살려나가기 위해서 월요일은 월요특집을 하고 그 뒤에다가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붙이다가 결국 그게 이제 시사자키로 발전을 하게 되죠.
◇ 정관용> 1990년 만들어서 시사자키는 계속 CBS의 저녁 시간을 책임지고 있고요. 처음 90년에 시사자키가 시작했을 때부터 제가 거의 한 4년 동안 매주 한 번씩 고정 출연하는 정치평론 담당자였습니다. MC는 여러 사람 갈아치웠는데 저는 몇 년을 계속했어요. 저도 시사자키랑 또 CBS랑 보면 참 인연이 깊어요.
◆ 변상욱> 그러네요.
◆ 강대인> CBS 하면 정 선생님 생각나고 정 선생님 생각하면 CBS 생각나고 그렇게 됐습니다.
◆ 변상욱> 지금도 직원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꽤 있을 것 같은데요? (웃음)
◇ 정관용> 자화자찬 겸 홍보 겸 다했으니까요. 이제 좀 쓴소리도 듣겠습니다. 30년 뉴스 부활하고 우리가 꼭 잘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밖에서 보시면서 우리 강대인 이사장님 어떠셨어요?
◆ 강대인> 글쎄요, 뭐 제가 CBS 안에 있었던 사람 입장에서 쓴소리 한다는 게 참 쉽지는 않은데요. 우선은 이런 걸 먼저 이해하고 가셔야 될 것 같아요. 처음에 이제 CBS가 방송을 시작할 때도 뉴스를 내보내야 되지만 자체적으로 뉴스를 제작할 수 있는 인력이나 기술력 같은 것들을 확보하지 못했었다 하는 점이고요.
그런 것이 70년대의 일반 방송과 경쟁을 하던 시대에서도 역시 열악한 인력 사정이 아주 발목을 잡아오죠. 그래서 기자들에 대한 재훈련 과정이라든지 또 부족한 기자재 문제라든지 예를 들면 취재할 수 있는 그런 장비들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상존했었고 그 이후에 특히 뉴스가 부활한 그 이후에도 CBS의 재정적인 형편 때문에 쉽지 않았던 거니까 그런 거를 감안해 봤을 때에 그래도 뉴스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 애쓴 분들의 노고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다만 이제 뉴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뉴스냐, 이렇게 우리가 묻는다면 뉴스를 결정하는 뉴스 가치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사용하는 뉴스 가치들을 그냥 우리가 그대로 사용합니다. 시의적절한 것이냐 또 이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것이냐. 또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냐. 또 이게 규모가 어느 정도가 돼서 정말 충격적인 것이 될 수 있겠느냐. 뭐 이런 것들이 뉴스를 결정하는 일반적인 뉴스 밸류라고 그렇게 부르는데 그러나 그런 것에 매달려 보면 그건 뭐 서양 언론의 판박이밖에는 다름이 아니죠.
그러니까 CBS 그러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어떻게 실현해 가는 그런 궁극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는 기관이니까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도 뭔가 다른 사람들이 또는 다른 매체가 바라보지 아니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력.
◇ 정관용> CBS만의 관점?
◆ 강대인> CBS만의 관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발굴하고 개발해 나가야 되는데 과연 그런 노력들이 정말 그대로 다 따라왔겠느냐 하는 점에서는 좀 한번 돌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끊임없이 우리가 되돌아보고 또 노력할 대목 마지막으로 말씀 듣도록 하고요. 우리 황우선 교수께서는 마지막 말씀으로 언론환경이 또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라디오방송으로서 어떤 한계랄까. 이런 것은 뚜렷한데 거기에 좋은 말씀 짧게 한 말씀만.
◆ 황우선> 이제 1인 미디어 시대라고 표현을 합니다. 디지털뉴스 생태계가 이렇게 등장하면서 나타난 변화인데요. 이제는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이렇게 인터넷신문도 만들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됐습니다마는 그러면서 이제 언론사들이 아주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고요. 여기서 큰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 언론의 뉴스 기능, 저널리즘 역할이 상당히 후퇴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널리즘의 고유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환경 감시 기능. 감시견 역할과 또 언론사 영업 행위의 구분이 아주 모호해져가는 그런 경향도 있거든요.
그래서 앞서 우리 CBS가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는 우리나라 언론 모두의 공통 목표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얻어내느냐가 큰 과제였다면 오늘날에는 이제는 광고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저널리즘을 지켜나갈 것이냐가 아주 큰 과제가 됐거든요. 앞서서 언론 통폐합 과정에 광고 없어지고 또 뉴스 없어졌을 때 한국 교회가 각 교단이 연합해서 CBS를 지켜냈던 것처럼 지금은 다시 한국 교회가 또 연합을 해서 적극적으로 CBS를 후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걸 통해서 바로 광고권력으로부터 CBS를 진실 보도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이 CBS를 통해서 기독교의 정체성,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을 실현하고 특별히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진실보도를 지켜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정치권력,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그것이 언론의 가장 기본 본령이 되겠고. 마지막으로 우리 변상욱 대기자님 뉴스 부활 30년 맞아서 CBS 언론인 선언도 발표하신다는데 한 30초만 이야기 정리해 주시죠.
◆ 변상욱> 26일 광화문광장에서 감사 콘서트를 열면서 그 현장이죠. 그래서 언론인 선언이 여기에서 CBS 식구들이 뜻을 모아서 발표가 됩니다. 아까 강 이사장님 설명하신 대로 인류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을 신장하고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돌본다는 것과 그리고 역시 박애와 희생, 인간성 회복이라는 기독교적 가치를 지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CBS 언론인 선언이 이날 발표될 예정이고요. 또 그렇게 그걸 따라서 노력을 해야죠.
◇ 정관용> 조금 아까 황 교수님 지적해 주신 정치권력뿐 아니라 광고권력,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게다가 CBS 언론인 성명에는 참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하나 들어 있어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에 대한 유혹, 여기로부터 우리를 지켜냅시다’라는 그런 정신으로 저희 CBS는 앞으로도 계속 굳건하게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여기까지 가니까 제가 CBS 직원같이 돼버렸는데 저는 사실은 직원은 아니지만 CBS와 워낙 오랜 인연을 갖고 있는 언론인입니다. 함께해 주신 우리 강대인 미디어시민모임 이사장, 대덕대학교 황우선 교수님. 또 CBS의 변상욱 대기자 세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 황우선> 고맙습니다.
◆ 변상욱> 고맙습니다.
◆ 강대인> 고맙습니다.
◇ 정관용> 이렇게 CBS뉴스 부활 30주년 특집좌담 ‘CBS 저널리즘과 한국의 민주주의’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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