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개혁위원회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로 박근혜 정부 국정원이 문화예술계 좌편향 단체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과 정부지원금 차단 업무를 수행했다는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김 전 실장의 항소심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국정원 개혁위는 30일 전 정권 국정원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좌편향 인물·단체 검증 요청을 받아들여 약 8500명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이 중 348명을 '문제 인물'로 분류했고, 이 과정에 김 전 실장이 깊숙히 개입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개혁위에 따르면 집권 1년차였던 2013년 12월 김 전 실장은 "문화예술과 미디어 부분에 좌파가 많다. 공직 내부에도 문제인물이 있으니 잘 살펴봐야 한다"고 언급했고, 국정원은 다음달 청와대에 '문예기금 운용기관의 보조금 지원기준 보완 필요 의견'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국정원은 또 2월20일에는 '문화진흥기금 지원사업 심사체계 보완필요 여론'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노무현재단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관여한 연구단체 '민족미학연구소', 이념 편향 연극이라고 지칭한 '혜화동1번지' 등이 문화진흥기금을 받고 있다며 이에 대한 시정 필요성을 보고했다.
심지어 지원금 결정을 문화진흥기금 공모선정 심의위원회가 아닌 별도 이사회에서 해야하고, 심의위원의 과거 활동경력과 이념편향 여부에 대한 철저한 검증도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김 전 실장은 국정원의 보고를 받은 바로 다음날 문체부에 "문체부 예산과 기금이 좌파세력에게 흘러들어가고 있고,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심사위원에도 문제가 있는 만큼 국정원과 협의해 정체성을 검증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김 전 실장의 지시를 받은 문체부는 곧바로 국정원에 좌파 문화예술 단체와 인물에 대한 검증을 요청했고 국정원은 문체부 검증 요청을 수행했다.
이같은 작업은 김 전 실장의 지시가 있었던 2014년 2월부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수면 위로 불거진 2016년 9월까지 진행됐고, 총 8500여명에 검증작업과 이 중 348명에 대한 정부 지원금 배제가 이뤄졌다는 게 국정원 개혁위 발표의 골자다.
청와대의 구체적인 '좌파 제압' 지시로 국정원이 좌파인사 검증을 진행했고, 문체부 또한 적극적인 검증을 요청했다는 국정원 개혁위의 발표는 "추상적 지시만 했을 뿐 실무자들이 알아서 진행한 것"이라는 김 전 실장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김 전 실장의 항소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정원 개혁위가 관련 자료를 항소심 재판을 진행중인 검찰에 전달하기로 결정하면서 김 전 실장은 더욱 궁지에 몰릴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김 전 실장 측 변호인은 지난 24일 서울고법 형사3부(조영철 재판장) 심리로 열린 항소심 2차 공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김 전 실장은 추상적 지시를 한 것이다. 밑에 실무자들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방법이 잘못됐다"며 직권남용 혐의를 정면으로 반박한 바 있다.
또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의무없는 자가 그 일을 하게 해야하는데 (박영수 특검) 공소장에는 지원배제 명단이 명확하게 특정되지 않았기에 공소가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이 국정원 보고서를 토대로 "문체부 예산이 좌파세력에게 흘러들어가고 있다", "심사위원들의 정체성을 검증하라"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고,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8500여명에 대한 전방위 사상검증이 실시된 만큼 모호한 공소장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은 지난 7월 1심 재판에서 블랙리스트 작성 및 실행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했다. {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