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로 디캠프 6층 다목적홀에서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가 열렸다. (사진='여기컨' 페이스북)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한복판에서, 동행도 있던 피해자가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은 사건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특히 여성들의 '각성'이 이어졌다. "내가 죽을 수 있었다"는 공포와 슬픔을 나눴고 여성혐오살인이 더 이상 일어나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테크업계의 페미니스트 모임 테크페미 역시 올해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 당시 추모 메시지를 남기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애도의 뜻을 함께한 바 있다.
테크페미는 테크업계에 종사하는 기획자·디자이너·개발자·창업자 등 다양한 직무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부족한 것에 착안해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이하 '여기컨')를 준비했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판매한 사전 입장권이 모두 매진돼 당일 판매가 불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초 모금액의 259%인 647만 8천 원이 모인 것도 '여기컨'을 향한 열기를 보여준다.
4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선릉로 디캠프 6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여기컨'의 본 행사는 테크페미의 옥지혜 씨의 첫 발표로 시작됐다. '만나고 나누고 성취하고'(Meet, Share, Achieve)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현업에서 활동하는 여성 기획자들의 생생한 경험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마련된 '여기컨' 현장을 다녀왔다.
◇ "여성 기획자는 왜 힘들까"라는 질문에서 시작
'여기컨' 참석자들이 옥지혜 씨(맨앞 오른쪽)의 첫 번째 발표를 듣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테크페미의 멤버인 옥지혜 씨는 리베카 솔닛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따온 '여성 기획자는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라는 발표로 '여기컨'의 탄생 배경을 소개했다.
옥 씨는 기획자가 '무슨 일을 할지 정하고, 그걸 어떻게 할지 고민해서, 그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기에, 리더이자 커뮤니케이터라고 봤다. 여성이 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답을 같이 구하는 '여기컨'이라는 행사를 떠올리게 됐다.
올해 미국 테크업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8%가 멘토가 적거나 없다고 답했고, 42%가 동종업계 내 롤모델이 없다고 답했다. 일정 단계 이상(리더급)에 진입한 여성이 적은 현실을 보여준다.
각 부문 담당자들과 소통하며 '일이 되게' 해야 하는 기획자들은 감정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대개 여성의 몫처럼 여겨진다.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어도 '업무'로서 평가받지 못하는 한계가 존재한다.
옥 씨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수평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테크업계에서도 명백한 성차별이 있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감정노동을 부담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산출물을 직접 내지 않기에 정성평가를 당하는 기획자들이 있다"며 "이런 자리가 매우 적고, 더 많은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아야 한다고 봤다"고 밝혔다.
◇ 잘 나가는 앱 기획자, 창업자, 프로이직러까지
옥지혜 씨와 정인혜 씨의 질의응답 시간. 옥지혜 씨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여기컨'에는 각자의 위치와 개성이 돋보이는 '이야깃거리'를 들려 줄 연사들이 연달아 나왔다. 출시 2달 만에 앱스토어 교육 부문 1위에 오른 후, 현재까지 매출 1위를 지키고 있는 영어교육 앱 '슈퍼팬' 기획자 정인혜 씨, 마케터를 하다 경력단절 이후 '베베템'이라는 육아서비스를 만든 양효진 씨, 7년 동안 7번 이직한 강미경 씨 등이 그 주인공이다.
정인혜 씨는 '슈퍼팬' 앱 기획 과정을 설명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꾸준히 공부해 영어실력을 늘리는' 목표를 세운 후, 결제 전환율을 개선한 이야기까지 상세히 전했다.
기획자로서 커리어를 쌓는 방법을 묻자 "저는 창업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리고 여유가 있다면 창업이나 스타트업에 가는 것들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며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왜 이렇게 했는지 항상 기록하고 배운다면 금방 좋은 기획자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육아를 대부분 여자가 하는 건 옳지 않다. 육아는 우리 모두의 의무다. 따라서 육아용품을 구매하는 건 누구나 가능한 일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육아용품 추천 서비스 '베베템'을 만든 양효진 씨는 창업 도전기를 전했다.
강미경 씨와 양효진 씨의 질의응답 시간. 양효진 씨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베베템'은 아기의 개월수를 입력하면 그 시기에 필요한 육아용품을 알려주는 서비스다. 양 씨는 육아가 '엄마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콘텐츠에는 '부모'나 '양육자'란 단어를 쓰고, 중성적인 진보라색을 메인 컬러로 썼다고 설명했다.
"기혼 유자녀 페미니스트에 대한 롤모델이 없는 것 같았다"는 양 씨는 "저도 경력이 끊겨서 창업을 결심했다. 주변에 오랫동안 회사를 다닌 사람이나 창업하는 사람이 있으면 되게 용기가 된다"며 "작은 승리의 롤모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야놀자의 기획자 강미경 씨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기획자 스타일을 분석해, 본인은 어떤 상이고 그동안 다녔던 회사가 요구했던 상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소개해 흥미를 돋웠다.
테크업계 종사자들에게 중요한 '포트폴리오 관리'가 기획자에겐 쉽지 않다는 것에 착안해, 참석자들에게 '역기획서' 쓰기와 블로그로 포트폴리오 만들기를 권하기도 했다.
이어, 강 씨는 본인이 관심있어 하는 서비스를 회사 밖에서 만들어 보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추천했다. 그는 "언제 버려도 미련 없이 작게, 하지만 꼭 완성시켜야 한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기획해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며 "메뉴 구성의 불합리와 나의 부족함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 "기획자가 정확히 어떤 일하는지 알게 돼 좋았다"테크페미가 준비한 행사였지만 '여기컨'에 선 연사들이 전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발표나 질의응답 중 누군가는 페미니즘 이슈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잘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컨'을 기획한 옥지혜 씨는 연사 섭외 기준을 묻는 질문에 "반드시 여성 기획자가 페미니스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업계 내 여성의 위치가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 몫을 해 나가는 여성들의 경험 자체를 듣는 게 의미 있다고 봤다.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기컨' 참석을 위해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취업준비생 권화담 씨는 "현장에서 기획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정확히 기획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며 "평소에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고 여성이기에 겪는 부조리한 상황이 걱정돼 오게 됐다"고 밝혔다.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밝힌 김민선 씨는 "IT 업계 여성 수가 많고 직군별 그룹은 많은데 페미니즘적인 이슈를 나눌 만한 곳이 없었다"며 "IT 종사자 가운데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 궁금했고 여기 와서 체감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보기 드문 '기획자 컨퍼런스'에 호기심이 생겨 오게 됐다는 개발직군 성선혜 씨는 "마케터→기획자, 프로그래밍 전공→기획자 등 커리어를 바꾸는 게 쉽지 않은데 그걸 해 낸 분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 자체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전했다.
테크페미는 '여기컨'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사후 설문조사를 벌여 후속행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할 계획이다.
(사진=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