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장례식에서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영정을 껴안은 채 울부짖고 있다. (사진=전태일재단 홈페이지 캡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한 노동자가 노동 환경 개선을 외치며 불길에 몸을 던진 지 47년이 지났다.
평화 시장에서 미싱 재단사로 근무하던 전태일 열사의 얘기다.
오랜 노동 운동 끝에 몸을 불사른 그에게도 행복한 시절은 있었다.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전 열사는 대구에서 청옥 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로 꼽았다.
유복하지 않았던 어린시절이지만 그는 가족과 함께 지낸 그때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힘든 노동의 순간들을 버텼다.
그러나 정작 그는 고향인 대구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2015년 대구 중구 계산오거리 교통섬에 설치된 '전태일 열사' 푯말. (사진제공=대구참여연대 제공)
◇ 2015년 '전태일공원' 무산지난 2015년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전태일공원' 조성을 추진했지만 이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법령에 가로막힌 까닭이다.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대구시민 문화제추진위원회'는 전태일 열사가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 중구 남산동 인근에 공원을 조성하려 했지만 부지가 마땅치 않았다.
그가 태어난 생가터는 이미 모습을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했고 그가 살았던 생거지는 사유지여서 공원 조성이 힘들었다.
추진위는 할 수 없이 그 일대인 계산오거리 교통섬을 부지로 낙점했다.
그러나 교통섬 면적이 워낙 좁은데다가 도로교통법상 교통섬은 공원으로 전환될 수 없어 일은 거기서 중단됐다.
추진위는 시민들이 전 열사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목재로 된 작은 푯말을 설치했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중구청은 해당 푯말을 '무단 설치물'로 규정하고 광고물관리법 위반으로 수거해갔다.
노동을 위해 애쓰던 전 열사를 고향에서 기리기 위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전태일공원'이 될 뻔한 교통섬은 현재 고압선 주의 표시만 남아있다. (사진=대구참여연대 제공)
◇ 대구시내 전태일에 대한 시설물은 전무한 상태추진위는 당시 중구청과 대구시 등에 '전태일공원'을 추진해야 하는 필요성을 강력히 역설했다.
열사의 희생을 기리고 앞으로 우리시대 노동의 희망을 꿈꾸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구시내 전 열사와 관련한 시설물은 생겨나지 않았다.
시민단체는 단순히 법률적인 문제가 공원 조성의 걸림돌이었다면 중구청과 대구시가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 대구 어디에도 전 열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표지판이나 푯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이념적 문제 때문이 아니겠냐. 전태일 열사가 노동 운동을 했다고 해서 아직도 빨갱이로 낙인 찍는 시각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 시민단체 주축으로 '전태일기념관' 건립 추진…이번에는?대구지역의 일부 시민·노동 단체는 최근 '전태일기념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전 열사가 살던 집이 그대로 보존된 남산동 2178-1번지를 매입해 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주장이다.
대구참여연대 김채원 시민참여팀장은 "시민들의 모금 활동을 통해 이번에는 사업을 꼭 성사시켜 전 열사의 정신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구시의 입장은 또 다르다.
대구시는 달성군에 '노사평화의 전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현재까지 '전태일기념관' 조성에 지원할 계획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 동력만으로는 기념관 조성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 팀장은 "최근 여권에서 기념관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지원 의사도 밝혔다"며 성사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