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흥행하면서 한국 사회가 걸어 온 민주화의 길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명식(62) 씨는 6월항쟁을 이끈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연합기구)에서 조직국장으로 활약한 숨은 주역입니다. 그의 증언을 밑거름으로 유신시대부터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까지 한국 민주주의 여정의 중요한 순간들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미안하다"…'1987' 6월항쟁 숨은 주역의 눈물② "박정희 죽고 TV에 뜬 전두환, 싸움 직감했다"③ "문재인 정부 실패하면 또 다른 MB 온다"<끝>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3일 오후 서울 강남 사무실을 방문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운명의 해인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독재정권의 폭압에 짓눌려 있던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다.
이명식 씨는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바로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소집된다"며 "이에 따라 2월 7일 박종철 군 추모대회가 조직되고, 49재 때인 3월 3일 고문 추방 국민평화대행진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앞서 1986년 전두환 정권이 민통련 사무실을 폐쇄하고 불과 보름 만에 박종철 군 사건이 터집니다. 그때부터 6월까지 대대적인 반격이 이뤄지죠. 정신 없이 보내던 나날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정권이 두 차례 민심에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는 4·13호헌조치이고, 나머지는 영화 '1987'로도 소개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 폭로였어요."
이 씨는 "3·3국민평화대행진 뒤 약간의 정체기가 있었는데, 4월 13일 전두환이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호헌조치가 이뤄진다"며 "그 뒤로 전국에서 이를 비판하는 성명이 쏟아지고, 각 지역별 특성에 맞는 저항운동이 타오르기 시작한하고, 본격적인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이 시작된다"고 전했다.
이어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기 추모 미사 도중,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발표하면서 국민적 공분이 들끓어 오른다"고 덧붙였다.
"전국 조직망을 갖춘 민주화 세력은 이 과정에서 한 곳에 역량을 집중하던 투쟁 방식을 버립니다. 2·7추모대회, 3·3국민평화대행진 등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이에 따라 정권의 대응이 눈에 띄게 약해지더군요. 어쨌든 시위가 벌어지는 곳에는 한 개 중대라도 병력을 투입해야 할 텐데,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열리니 서울에 집중되던 경찰력도 그만큼 분산돼 약해진 거죠."
그는 "이후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선언까지 이러한 전국 동시다발적 투쟁 방식은 계속된다"며 "1980년 광주항쟁의 실패와 좌절에서 얻은 교훈에 따라 전국 조직망을 갖춰 온 민주화 세력의 결실이 1987년 6월항쟁의 전국 동시다발적인 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당대 정치권의 양대 거목이던 고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본에 참여한 사건도 중요한 변곡점이었다고 이 씨는 설명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양김을 통해 정치권까지 끌어들여야만 국민운동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민들이 정권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역시나 '양김'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고는 이른바 수권 투쟁, 그러니까 권력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 될 수 없는 거죠. 국본에 양김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권력 인수 준비를 마치고 정권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의미였으니까요."
◇ 승리 뒤 찾아온 또 한 번의 좌절…미완의 혁명으로 기록되다
6월항쟁을 이끈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연합기구 '민통련'에서 조직국장을 지낸 이명식 씨가 지난 10일 서울 상봉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거리를 가득 메우면서 1987년 6월항쟁은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면서 국민들에게 승리의 기쁨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해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제13대 대선에서 전두환 씨의 후계자로 지목돼 온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국 민주주의 역사는 또 한 번 커다란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이 씨는 6월항쟁의 한계점을 세 가지로 요약하기에 앞서 "먼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결정적인 싸움의 과정에서 김근태·문익환·이부영·장기표 선배와 같은 민주화운동 지도자 대부분이 감옥에 가거나 수배돼 리더십의 공백이 다소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전제를 달았다.
"지난해 촛불혁명이 '혁명'으로 불릴 수 있는 데는 박근혜를 퇴진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혁명도 마찬가지죠. 만약 촛불을 아무리 많이 들었어도 박근혜를 물러나게 하지 못했다면, 새로운 정부를 세우지 못했다면 촛불 역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겠죠."
그는 "이 점에서 6월항쟁은 전두환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던 것"이라며 "6·29선언으로 가는 과정에서 '전두환 즉각 하야' '즉각 퇴진'으로 몰아갔어야 했다는 반성이 크다"고 말했다.
6월항쟁의 두 번째 한계점으로 이 씨는 "수권 세력으로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전략적인 단일화 실패"를 꼽았다.
"6월항쟁의 공동투쟁체로서 국본을 세우는 데까지는 갔는데, 정치인들을 옭아맬 수 있는 방편을 찾지 못한 거죠. 6·29선언 이후 정치인들은 다시 국회로 들어가 개헌에 참여하는 식이었어요. 재야의 한계, 당시 조직력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죠. 당대 사회 원로들이 주축이 된 '비상시국 수습 국민회의'를 만들어 야권의 참여를 강제하고 정권 이양을 요구하면서 정치 일정을 압박했어야 했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지금의 '87년 체제'를 만들어낸 당시 개헌 논의에 민주화운동 세력이 상당한 지분을 갖고 참여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분석을 이어갔다.
"6·29선언 이후 YS(고 김영삼 전 대통령)를 지지하는 사람은 YS 쪽으로,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를 지지하는 사람은 DJ 쪽으로 줄을 서면서 재야 세력이 분열됩니다. 양김에 빨려 들어가면서 재야 자체는 공동화 되는 상황이 초래된 거죠. 이는 결국 양김의 단일화 실패로 이어지면서 재야 스스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씨는 "재야 스스로 수권 세력이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더라도, 내부 구심력을 잃지 않고 양김에 줄을 서지는 말았어야 했다"며 "우리 스스로 양김의 흡인력에 빨려들어가면서 자체 분열했고, 그 분열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반성했다.
이어 "당대 민주화운동 세력이 적극적으로 개헌에 참여해 87년 헌법을 더 나은 헌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그것을 관철해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 "커다란 기대감이 배반감으로 바뀌는 순간, 또 다른 이명박은 온다"
지난해 2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17차 범국민행동의 날 집회에 운집한 시민들이 레드카드와 촛불을 들고 당시 대통령 박근혜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6월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해낸 이후 30년 동안 7명의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서 탄생했다. 6월항쟁의 결과물인 '87년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개헌의 당위성도 몹시 커진 상태다.
이 씨는 "우리 세대가 1987년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시기를 거쳤다"며 "그나마 6월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노태우 체제는 전두환 체제보다 유연했고, 북방정책에서는 상당한 진일보가 있었다. 당시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청문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희망을 줬던 시기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는 "3당 합당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 '3당 야합'으로 이야기 되기도 하지만, 김영삼은 근본적으로 6월항쟁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며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등을 단행해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음에도 아들 김현철 씨 비리, 외환위기 등으로 후반기 정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어려운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일 아쉬운 대목은 DJ·노무현 10년"이라고 언급했다. "외환위기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의 극심한 사회 양극화 문제에서 그 10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삶이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DJ·노무현 체제 10년간 심화된 양극화 등의 문제는 상당한 배반감으로 다가왔어요. 그 배반감이 우리를 대단히 천박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이명박을 부른 겁니다. '이명박이 되면 경제는 나아질 거다'라는 막연한 기대에, 그가 도둑놈이고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쪽으로 몰려간 셈이죠."
이 씨는 "결국 DJ·노무현 체제 10년간은 국민들의 삶에 천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정성 있는 태도를 견지했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놓아 버린 측면이 안타깝다"며 "그 결과로 초래된 이명박·박근혜 10년은 뼈아픈 기간이다. 남북 문제는 얼마나 후퇴했으며 민생 문제는 얼마나 어려워졌는가"라고 통탄했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이번 정부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번에야 말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잘해야 해요. 문재인 정부가 정신 차리고 정말 조금이라도 달라진, 나아진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중요한 것은 정책들이 대중의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연결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나중에 가면 사람들은 '내 삶이 조금 나아졌나'라는 이야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는 "국민들에게 '그래도 내 삶이 조금 나아졌다'는,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다'는 확신을 줘야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현 정부에 대한 커다란 기대감이 배반감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이명박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정권 잡은 사람들은 정말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잘나서 정권을 잡은 게 아니에요. 더불어민주당이 잘해서 국민들이 정권을 넘긴 게 아닙니다.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국민들이 기회를 줬다'는 점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놈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잘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