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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거나 죽거나, 급기야 사라진 한국영화 속 여성들



문화 일반

    미치거나 죽거나, 급기야 사라진 한국영화 속 여성들

    [페미니즘으로 문화 읽기 ⑤] 신자유주의시대 한국영화의 섹스와 계급

    2015년 이후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문화 콘텐츠들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읽으려는 시도들이 활발해졌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CORE 사업단이 주최하고 성균관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와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주관하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도 한 예다. 영화·미술·공연·대중음악·웹툰·팟캐스트·SNS·게임 등 여러 장르에서 전개되는 페미니즘 문화비평을 두루 다루는 이 강의는 16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다. 1강부터 10강까지 전 강의를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약 100년 전,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애정발표'를 했다
    ② 영화 '아가씨' 히데코-숙희 옷으로 보는 크로스드레싱
    ③ "이게 작품이냐?"… 여성이기에 폄하 당했던 예술가들
    ④ '이상한 여자'… 1970년대 미디어의 성매매 여성 낙인찍기
    ⑤ 미치거나 죽거나, 급기야 사라진 한국영화 속 여성들
    <계속>

    "최근 한국영화에서 봤던 가장 섹스씬 중에서 가장 섹시했던 게 뭐였나요?"

    20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에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문화사' 5강 강연자로 나선 영화평론가 손희정 씨는 청중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장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희정 씨는 최근 젠더 연구자들과 위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박사논문에 썼던 내용을 떠올렸다. 3포 세대가 포기한 '연애·결혼·출산'은 국가의 재생산 담론 안에 들어와 있는 문제이면서도 모두 섹스와 관련돼 있는 것이라며, 섹스 자체가 계급의 문제가 돼 어떤 계급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상상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섹스리스의 K시네마─신자유주의시대 한국영화의 섹스와 계급'이라는 주제의 이날 강연은 한국영화에서 더 이상 인상적인 섹스씬이 나오지 않는 기원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때 여성 캐릭터의 소멸, 20~30대 남성 캐릭터의 부재까지 함께 다뤄졌다.

    ◇ 2000년대부터 본격화된 '남성 위로' 영화, 2017년 정점을 찍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해 박스오피스 상위 10위에 이름을 올린 작품은 '택시운전사', '신과 함께-죄와 벌', '공조', '범죄도시', '군함도', '청년경찰', '더 킹', '꾼', '강철비', '남한산성'이었다. 20위권 내로 넓혀도 여성이 남성보다 극중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작품은 11위를 차지한 '아이 캔 스피크'가 유일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NEW, 메가박스㈜플러스엠,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주)쇼박스,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제공)

     

    손희정 씨는 2017년을 '남성연대' 영화 개봉이 정점에 올랐던 해로 소개했다. '대립군', '남한산성', '대장 김창수', '박열', '군함도', '택시운전사', '1987' 등 임진왜란-병자호란-구한말-식민지 시기-해방 직전-광주-1987까지 긴 역사를 '다시 쓰는' 시도가 있었고, '공조', '더 킹', '프리즌', '청년경찰', 'V.I.P.', '꾼', '범죄도시', '신과 함께', '강철비' 등 현대물조차도 남성들이 스크린을 그득 채웠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포스터를 한데 모은 사진을 올리며 "누가 보면 한국에는 여자 배우가 아예 없거나 여성의 영화 출연이 금지된 줄 알겠다"고 한 이송희일 감독의 지적도, 한국 영화판의 '남성 쏠림' 현상을 잘 보여준다.

    손희정 씨는 'V.I.P.'와 '남한산성'을 예로 들어 스크린에서 사라진 여성의 현재를 설명했다. 여럿이 주인공을 맡은 'V.I.P.'에는 그 자리를 남성에게만 허락했다. 딱 11명 나오는 여성 중 2명은 극중 납치 강간당하거나 맞았고 나머지 9명은 시체였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 이들을 '여자 시체'로 기재했다 비난을 받았고 이후 '여자 역'으로 고쳤다. 이내 한국영화에서 '여자는 곧 시체인가' 하는 물음이 뒤따랐다. '남한산성'에서 대사를 가진 여성은 5살짜리 소녀가 유일했다.

    손희정 씨는 "2017년에도 40~50대 남성 배우들, 30대 후반까지의 배우들이 (스크린을) 독식했다. 이때 사라지는 건 여성 캐릭터만이 아니다. 20~30대 남성 캐릭터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섹스가 없을 수밖에"라고 설명했다.

    여성과 젊은 남성이 지워진 자리에는 '아버지'가 남았다. 영화에 계속 나오는 것은 나이 많은 남성-여성, 즉 '아빠와 딸'이라는 것이다. 손희정 씨는 '파송송 계란탁', '우아한 세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마이 파더' 등 2000년대를 수놓았던 수많은 아빠 중심 영화를 들며 "기가 꺾이거나 외롭거나 성장하지 못한 아버지들에게 아이가 뚝 떨어져 성장하게 되는 서사가 많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후반에도 '가장' 혹은 '부성애'를 다룬 영화가 자주 등장했다. 왼쪽부터 '파송송 계란탁'(2005), '우아한 세계'(2006), '브라보 마이 라이프'(2007), '마이 파더'(2007).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어, "경제 주체인 아버지를 위로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해 나가자는 얘기였다. 대중문화가 아버지와 남성을 위로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이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무언가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함께 고생하던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이라는 존재는 싹 지워졌다"고 부연했다.

    '천만 영화'가 된 작품들만 봐도 좀처럼 여성의 존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 캐릭터가 2명 이상 나오고, 둘이 대화를 나누되, 주제가 남성이 아닌 것이어야 한다는 '벡델 테스트'를 유의미하게 통과한 영화는 '도둑들'과 '암살' 정도에 그칠 만큼. 손희정 씨는 이 결과를 "남성의 과대 재현과 여성의 상징적 소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2000년대부터 2017년까지 오면서 단단하게 유지된 하나의 세계관은 '남성 주체를 위로해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었다고 진단했다. 남성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황정민은 깡패-보스-1번 경찰-검사가 되고, 조연급 형사 역이었던 마동석이 드디어 1번 경찰이 되며, '부당거래'에서 조연급 형사로 나왔던 남성 배우들 중 절반 정도는 이제 투톱-쓰리톱의 주연이 될 만큼 성장한 것을 예로 들었다. 여기에 끼지 못한 여성들은 당연히 '성장'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달되기 시작한 '특이한 시대', 1990년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비중 있게 다루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손희정 씨는 1990년대를 '정치학이 윤리학에 그 자리를 내주는 문화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영화산업에서는 기획 영화 시대가 열렸던' 시기라고 규정한 후, 당시 영화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손희정 씨는 "이제까지는 직업이 의미 없는 여자들이 나왔다면 이때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일과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가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여성들은 성우('결혼 이야기'), 비디오 판권 딜러('미스터 맘마'), 영화사 사장('마누라 죽이기'), 작사가('닥터 봉') 등의 모습으로 재현됐다.

    1990년대에는 직업을 갖고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이 일과 사랑을 고민하는 작품이 본격 등장했다. 다만 여성 캐릭터의 서사는 대부분 '모성애'와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성은 '모성이 타고난' 존재라는 것이 부각됐다. 아이만 남기고 떠난 본처 대신, 직장 동료와 아이를 매개로 정상가족을 이루게 된다는 '미스터 맘마', 사이가 매우 나빴지만 결국 임신에 성공해 해피엔딩이 되는 '마누라 죽이기'가 대표적이다.

    손희정 씨는 "(90년대에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화들이 다소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을)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그냥 두기에는 불안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에는 늘 모성 이데올로기로 마무리했다"고 평가했다.

    1999년에 개봉해 전도연이 국민 여배우가 되는 데 기여한 '해피엔드'(감독 정지우)는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IMF 여파로 정리해고 당한 후 육아와 가사를 돌보는 남편을 둔 능력 있는 학원 원장인 아내가 첫사랑과 만나 불륜을 하고, 결국 비참하게 죽임 당한다는 이야기다.

    손희정 씨는 "한국에서 남성의 경제권은 곧바로 남성성과 연결돼 있다. 남성성의 상실은 성적 능력 상실로도 이어진다"며 "경제력 있고 성적으로도 자유로웠던 여성이 어떻게 남편에 의해 제거 당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해피엔드’에서 최보라라는 캐릭터가 살해당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영화적 사건으로, 이후 한국영화판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어린이 영어학원 원장으로 사회적 입지가 탄탄한 젊은 여성이 실직한 후 가사를 도맡아 온 남편과 자주 충돌하다 옛 애인과 밀회를 나누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해피엔드' (사진=명필름 제공)

     

    ◇ 괴물이나 유령이 되고, '문제 인물'이 되어 온 여성들

    1990년대 말 이후로도 한국영화에 여성은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존중 받거나 탐구해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괴물, 괴신, 미친 여자, 유령 등 남다른 외피를 하고 나타났다. 이때도 여성 캐릭터들은 모성애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었다.

    아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으로 며느리를 괴롭히는 여성을 그린 '올가미', 낙태한 여자는 벌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준 '하얀 방', 생물학적 어머니가 사회적 어머니보다 위대하다는 '폰', 자신이 임신하고 나니 입양한 아이가 뱃속의 아이를 위협할 거라고 믿는 '아카시아'까지, 하나의 장르를 구축했다는 게 손희정 씨의 설명이다. 캐릭터 특성상 영화의 장르는 대개 공포나 스릴러물이었다.

    영화 '방자전'(2010)과 '후궁'(2012)은 여성이 유의미한 캐릭터로 등장하고, 드물게 섹스씬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안에 여성혐오적인 시각이 담겨 있었다는 게 손희정 씨의 진단이다.

    영화 '방자전'과 '후궁' (사진=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당대 엘리트 계급이었던 이몽룡과 낮은 계급이었던 방자가 춘향을 두고 싸운다는 '방자전'은 여성을 '평등한 남성연대를 해하는 재화'로서 그려냈다. 춘향은 두 사람 모두와 함께 사는 폴리아모리(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연애 형태)를 택하지만, 이몽룡은 춘향을 떠밀어 유아처럼 퇴행시킨다. 손희정 씨는 "춘향이 돈, 섹스를 다 가지고 싶어 하는 주체라서 죽인 것도 있지만, (그가) 남성 사회의 계급을 드러내는 존재였기 때문에 싫어한 점도 있다"고 전했다.

    '후궁'에서는 화연과 대비라는 강력한 여성이 나오지만, 이들은 그 '힘' 때문에 문제시되고 만다. 손희정 씨는 "(화연 때문에) 한 남자는 내시가 되어 물리적으로 피해를 입고, 나라 일을 다 망쳐 놨던 다른 남자는 섹스 중간에 칼 맞고 죽는다. 남성의 '경쟁자'로서 여성이 나오는데, 여성에게 매혹 당할수록 남성은 더 위험해지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엄청난 자원으로 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온라인에서 펼쳐지는 '역차별 담론'의 바탕이 되는 여성혐오"라고 말했다.

    손희정 씨는 "대중문화의 장에서 이런 것(남성연대 영화)들이 펼쳐지면서 팔리고 먹힌 데에는 남녀 모두 여기에 동의하며 지갑을 열었다는 의미다. 남성 가장 중심으로 경제를 되살리자는 주장에 수긍했던 이들이, 더 이상 '이건 아니'라고 목소리 내기 시작한 게 페미니즘 리부트였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성과 섹스가 사라진 한국영화의 문제점을 "단순히 섹스가 재현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가 말소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짚은 손희정 씨는 그 공백을 '암시되는 섹스'가 채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 '왕의 남자'(2005)와 '불한당'(2017)이 대표적이다.

    한 사람이 여러 차례 같은 영화를 보는 '회전문 관객'이 영화산업에서 처음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 '왕의 남자'의 성공 이후, 한국영화에서는 '브로맨스'라는 안전한 용어 아래 남성간의 애정 코드가 자주 나타났다. 그런데 왜 '불한당'은 '왕의 남자'만큼 흥행하지 못했을까. 손희정 씨는 "여성혐오와 게이혐오를 모두 내포한 '게이 코드'가 아니라 본격 '게이 로맨스'를 그렸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 더 열정적이고 깊은 사랑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20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에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5강 '섹스리스의 K시네마─신자유주의시대 한국영화의 섹스와 계급' 강연자로 나선 영화평론가 손희정 씨가 강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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