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칼럼] 우리가 당한 정신적인 비극



칼럼

    [칼럼] 우리가 당한 정신적인 비극

     

    존 버거의 산문집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 실린 ‘로자를 위한 선물’은 2018년 겨울 대한민국의 우울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이는 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존 버거로 하여금 암울한 시대에 글을 쓰게 하는 본보기였다. 존 버거가 로자를 기억하며 쓴 글을 보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 혁명가 로자는 옥중에서 새의 울음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는 틈날 때 마다 편지에 썼다. 새들은 저마다 자유롭게 각자의 목소리로 울지만 그 울음소리를 듣고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녀는 1917년 포즈난 감옥에 수감됐을 때 창 너머 붉은가슴방울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렇게 썼다. “이 새는 상당히 괴짜입니다. 다른 새들처럼 한 가지 울음소리를 가지거나 하나의 음으로 울지 않거든요. (……)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돌진하고는 갑자기 승리에 도취해 외칩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내가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뒤이어 귀를 기울였든 기울이지 않았든 모두를 향해 엄숙한 목소리로 경고하죠. ‘알게 될 거야! 알게 될 거야!’”

    로자는 1918년 러시아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볼셰비키식 태도에 내재한 위험을 이렇게 예견했다. “정부(혁명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다수라고 하더라도-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 정의라는 관념에 대한 열광 때문이 아니다. (……) 자유가 특권이 될 때 그 효용성도 사라질 것이다.” 로자는 이듬해 1919년 1월 15일 독일 민족주의 보수우익 깡패들(자유군단)에게 개처럼 맞아 죽었다. 그녀의 사체는 차가운 베를린 운하에 버려졌고 석 달 후 부패한 채로 발견됐다.

    존 버거는 로자를 회상하면서 그녀의 조국인 폴란드인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폴란드인들은 생각할 수 있는 권력의 추악함은 하나도 빠짐없이 겪어 봤기 때문에 대부분 권력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로자의 조국 폴란드 사람들을 향한 경의다. 한국 사람들은 폴란드 사람들보다 더하면 더했을 권력의 추악함을 보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권력의 유혹에 매번 속아 넘어갔다. 자기 연민이 강해서인지 추악한 권력에 대해서도 연민을 보였다.

    대한민국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촛불혁명은 그래서 위대하다. 권력의 추악함에 대한 유혹과 연민을 뿌리치고 광장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의 손에 들린 촛불로 세워진 정부라 해서 정치적 결정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혁명은 위대했고 새로운 계급의 탄생과 사회구조를 바꾸었지만 로자가 예견했던 것처럼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로자의 지적대로 그들만의 자유가 특권이 되자 그 효용성이 사라진 것이다.

    남북문제는 세계 현대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정치적 구조이자 실재적 상황이다. 비단 남과 북만의 일도 아니다. 세계 정치질서의 균형을 잡는 저울추(錘)가 되어 늘 아슬아슬하다. 그 속에 삶의 터전이 있는 시민들의 스트레스는 병적이다. 권력의 추악함을 극복하는 일도 버거웠는데 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을 60년이 넘도록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다.

    북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심리는 시간과 공간을 따라 발전과정을 거친다. 북한의 실상을 손바닥 보듯 환히 아는 시민들은 이제 대의명분 때문에 손해 볼 마음의 여유가 좁아지고 있다. 시민들은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로 죽음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다가갔고 더불어 공포를 느꼈다. 전쟁은 죽음의 문제이고 죽음은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낳게 된다.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한민국 시민 모두가 당한 정신적인 비극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평창올림픽의 북한 선수단을 둘러싼 내홍 역시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심리적 폭력이다.

    대다수 시민들은 남과 북이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예전처럼 반갑지 않다. 북의 정치적 행보가 스포츠의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한 폭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한 심리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서 이미 겪은 트라우마의 연장이다. 문재인 정부의 행보 역시 정치논리 때문에 공정과 정의를 외면한 배신으로 돌아온다.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로자로 돌아가자. 승리에 도취해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내가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뒤이어 귀를 기울였든 기울이지 않았든 모두를 향해 엄숙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알게 될 거야! 알게 될 거야!’ 라고 울어대는 붉은가슴방울새는 불행한 새다. 로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들의 지도자는 대중들 자신이며, 그들은 변증법적으로 자신들의 발전과정을 창조해 나간다.” 시민들은 변증법적으로 자신들의 발전과정을 창조해 나가고 있는 것이 맞다. 지도자가 대의명분에 떠밀려 시민 곁을 떠날 때 불행은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지난 15일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지 99년이 되는 날이었다. 로자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로자의 유언처럼 우리의 촛불도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당한 정신적인 비극을 위로해 주고 치유해준 촛불이기 때문이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