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역대 한국 여자 쇼트트랙 사상 첫 500m 금메달을 노리는 에이스 최민정.(사진=노컷뉴스)
큰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순간 경기장에는 놀람에 가득찬 비명과 함성이 가득했습니다. 세계 최강 한국 여자 쇼트트랙이 이대로 무너지는가 싶었습니다. 레이스 도중 발생한 치명적인 실수, 막내 이유빈(17 · 서현고)이 코너를 돌다 그만 넘어지고 만 겁니다.
이때 누군가가 비호처럼 튀어나왔습니다. 끊어질 뻔했던 한국 대표팀의 레이스를 이어 거침없이 내달렸습니다. 바로 에이스 최민정(20 · 성남시청)이었습니다. 최민정은 자신의 순서가 아님에도 곧바로 넘어진 이유빈의 손을 터치하더니 지체없이 폭풍질주를 펼쳤습니다.
최민정의 기민한 대처로 안정을 찾은 대표팀은 주장 심석희(21 · 한체대), 김예진(19 · 평촌고)까지 추격전에 가세하면서 차츰 거리를 좁혔습니다. 27바퀴를 도는 레이스에서 한때 반바퀴 이상 났던 앞선 세 팀과 격차는 13바퀴를 남길 무렵 좁혀졌고, 11바퀴를 남기고 최민정이 3위 도약을, 9바퀴 전 김예진이 2위를, 한 바퀴 뒤 심석희가 1위를 이끌었습니다.
결국 1위로 예선을 통과하며 결승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경기장은 열광과 환호의 도가니로 바뀌었고, 외신들은 "한국 여자 대표팀은 넘어져도 올림픽 기록을 썼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미국 쇼트트랙 스타이자 NBC 해설위원인 아폴로 안톤 오노는 "얼마나 거리를 벌려야 한국을 이길 수 있을까"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런 대역전 드라마가 가능했던 것은 흔들리지 않았던 팀 전체의 호흡이었지만 단연 최민정의 공이 컸습니다. 응급 상황에서 최민정이 발빠르게 나서고, 폭풍질주를 펼치지 않았다면 한국 여자 쇼트트랙은 안방에서 허무하게 결승 진출이 무산될 뻔했습니다. 사흘 전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계주 3000m 예선이 열린 강원도 강릉아이스아레나의 기적같은 경기였습니다.
경기 후 최민정은 중계 인터뷰 내내 숨을 헐떡였습니다. 너무 많이 힘을 썼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첫 질문을 마친 뒤 최민정은 기침까지 터졌습니다.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최민정이라도 해도 예기치 못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한순간에 에너지를 소비한 후유증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언니 구해줘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최민정(오른쪽)이 10일 3000m 계주 준결승에서 넘어진 이유빈과 터치하며 질주하고 있는 모습.(사진=노컷뉴스)
박세우 여자팀 코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지옥을 갔다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어 "최민정에 이어 나머지 심석희, 김예진이 순위를 바꿔준 3박자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활약을 펼쳐준 최민정에게 역시 고마움을 드러냈습니다. 박 코치는 "바통 터치하고 가장 힘든 위치에서 활주를 하고 밀어주고 바로 타야 되는 상황이 왔음에도 잘 해줬다"고 칭찬했습니다.
분명히 오버페이스이긴 했습니다. 박 코치는 "중간에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속도가 가장 빠르고 체력적으로도 가장 좋은 최민정이 역할을 해줘야 했다'면서 "그래서 최민정이 한 바퀴 반만 타야 되는데도 두 바퀴씩 연속적으로 계속 타줬다"고 강조했습니다. 최민정이 중계 인터뷰에서 그렇게 숨이 찼던 이유입니다.
최민정은 이번 대회 다관왕이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올 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에서 전 종목 랭킹 1위를 달렸습니다. 그런 최민정에게 3000m 계주 준결승에서 나온 돌발 상황은 컨디션과 리듬을 흔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체력 소모가 극심했던 만큼 개인 종목 경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민정은 기꺼이 폭풍질주를 펼치며 팀을 '지옥에서' 구해냈습니다.
짜릿한 역전 드라마를 이끈 뒤 12일 훈련. 최민정은 괴물처럼 회복했습니다. 남자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달렸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박 코치는 "남자팀이 내일 계주도 있고 단거리에 속하는 1000m도 있어서 전날 최대 스피드를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최고 속도를 냈다"면서 "남녀의 차이에도 최민정은 같이 속도 훈련을 해도 멀리서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스피드가 굉장히 많이 올라온 상태"라고 귀띔했습니다.
최민정은 "계주 예선에서 아무래도 체력 소모가 컸는데 이틀 지났으니 회복이 됐다"면서 "다음 날 시합 없어서 충분히 회복 잘 했다"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그 순간에는 좀 놀랐다"면서도 "터치가 어쨌든 빨리 됐으니까 평정심 찾으면서 우리가 항상 연습했던 대로, 작전대로 잘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말해서 첫 번째는 그런 상황이 나오면 안 되는 게 제일 중요하고 두 번째는 그런 상황이 나왔을 때 어떻게 대비하느냐가 관건"이라면서 "결승에서는 작은 실수는 아니지만 이런 실수가 안 나오게 해야 될 것 같다"고 다짐했습니다. 결승을 위한 액땜을 제대로 한 셈입니다.
'오늘은 여유 있죠?' 최민정이 12일 공식 훈련을 마치고 인터뷰를 한 뒤 13일 500m 경기에 대해 선전을 다짐하는 모습.(강릉=노컷뉴스)
이제 최민정은 13일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새 역사에 도전합니다. 사상 첫 500m 금메달입니다.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500m 최고 성적은 동메달이었습니다. 1994년 릴레함메르,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2개씩 따낸 '전설' 전이경 싱가포르 감독도 이루지 못한 게 500m 금메달입니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전 감독은 "현재 민정이는 진선유(2006년 토리노올림픽 3관왕), 나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라면서 "500m도 민정이가 상당히 공을 들인 상태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 거 같다"고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최민정 본인도 자신이 있습니다. 예선에서 42초870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최민정입니다. 결전을 하루 앞두고 최민정은 "500m가 워낙 짧은 순간에 승부가 나는 종목이라 변수가 많다"면서도 "나보다 더 준비를 잘한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가 이길 수도 있겠지만 나도 준비를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건 다 준비했으니 후회없이 훈련한 걸 펼친다면 좋은 성적이 따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넘어야 할 대상은 경쟁 선수들이 아닙니다. 최민정은 "경쟁자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킴 부탱(캐나다),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 엘리스 크리스티(영국) 등 쟁쟁한 선수들 대신 "저요"라고 답했습니다. "500m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에서 나와의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최민정입니다.(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김선태 대표팀 감독 역시 이 질문에 최민정이 돌아보자 "너!"라는 입모양을 짓더군요.)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좋은 결과만 기다리면 됩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최민정보다 더 많이 훈련하고 잘 준비한 선수가 있다면 그 금메달, 가져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겁니다. 금메달 쥐기 전에 누군가가 비호처럼 달려들어 낚아채 갈지도 모릅니다. 남자 선수와 훈련해도 안 밀리는 여자 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던져 위기의 팀 전체를 구해냈던 최민정. 이제는 잠시 팀을 떠나 온전히 자신을 위한 질주를 펼칠 때입니다.
'금메달 예감하고 미리 찍은 사진?' 최민정, 임효준, 김아랑 등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이 12일 훈련을 마친 뒤 강릉영동대 자원봉사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모습.(사진=노컷뉴스)
ps-최민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성남시청에 입단했습니다. 대학(연세대)에도 입학해 학업을 병행하고는 있지만 졸업 뒤 취업하는 다른 선수들보다 빨리 사회 생활을 하는 셈입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에게 넌지시 이유를 물어보니 "최민정의 집안 형편상 대학 생활만 하는 것보다 실업팀에 입단해 보탬을 주는 게 낫기 때문"이라고 귀띔하더군요. 어쩐지 대표팀을 든든하게 이끌고 있더라니…. 집안은 물론 대표팀, 나아가 한국 쇼트트랙을 떠받치고 있는 최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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