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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괴물'의 심장을 향해 돌을 던진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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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괴물'의 심장을 향해 돌을 던진 여인들

    (좌)최영미 시인과 (우)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 (사진=자료사진)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의 말처럼 최영미 시인과 극단 미인 김수희 대표가 밝힌 과거 성추행 발언 역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의심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지목한 상대가 한국 문단과 연극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거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둘 다 진보진영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사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20여 년 전 또는 10여 년 전에 있었던 성추행의 기억을 새삼 들춘 것을 두고도 의아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리베카 솔닛이 말한 1960~70년대 미국사회의 여성편견에 대한 일반적인 사례를 보면 이해가 된다. 미국의 여성인권운동가인 산드라 플룩(Sandra Fluke)은 의회 청문회에 나가 피임과 관련된 의료비도 건강보험 적용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증언했다가 '잡년' '매춘부'라는 욕을 들어야 했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살충제의 위험과 그로인해 지구에서 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경고한 '침묵의 봄'을 출간했을 때 언론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그녀에게 '히스테릭하다'는 딱지를 붙였다.

    당시 '잡년'이니 '매춘부'니 하는 욕을 먹었던 산드락 플룩과 '히스테릭한 여자'라는 비꼬임을 당했던 레이첼 카슨은 오늘날 그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영미 시인과 김수희 대표의 발언은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조명탄이다. 솔닛의 말처럼 "말을 꺼내는 것, 말과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존중받게끔 만드는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지만 말을 꺼낼 사회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그 말은 침묵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말을 꺼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달라진다. 보호받을 수 있고, 존경받을 수 있고, 주목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과 김수희 대표의 뒤늦은 성추행 고발이 수상한 것으로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자신들의 발언이 보호받고, 존경받고, 주목받을 수 있는 사회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적으로건, 사회문화적으로건 시대가 바뀐 것이다.

    수전 손택은 몇 세기 동안 여성이 "아이들보다 낫지만 남자보자 못한" "아이의 매력을 지닌 다 큰 아이" 정도로 취급받았다고 토로한다. 지금으로부터 10~20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 그중에서도 가장 창조적이고 전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계에서 여성은 남성들에게 여전히 '아이의 매력을 지닌 다 큰 아이' 취급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술자리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계 안에서의 관계구조, 특히 권력을 가진 선배 남성 예술인과 후배 여성 예술인의 관계는 불평등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가혹하고 치명적인 성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되기도 했다.

    젊은 후배 여성 예술인을 성적 노리개쯤으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선배 혹은 선생님으로 불리는 예술인은 대개 그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거물로, 독보적인 명성을 얻었다. 명성은 부와 권력을 눈덩이처럼 불려주면서 최영미 시인의 말대로 난공불락의 '괴물'이 되었다. 이 괴물들은 젊은 여성 예술인들의 신체보존권이라든지 자기결정권, 자기표현권은 안중에도 없다.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일삼는다. 더러운 손으로 여성의 몸을 만지고 주무른다. 거꾸로 여성에게 자기 몸을 만져달라고 요구한다.

    수전 손택의 '명성'에 대한 이해를 들어보면 진짜와 가짜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유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로 보이고 또 기억될 것인가"를 쉬지 않고 진심으로 골몰하면서 타인과 세계에 각인하는 삶을 살아온 자라야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했다.

    최영미 시인과 김수희 대표로부터 가해자로 고발된 예술인들의 명성은 '가짜 명성'에 불과하다. 가짜 명성을 이용해 문단과 연극계 혹은 미술계에서 거물인 양 행세하지만 실은 형편없는 괴물이다. 최 시인과 김 대표는 오래 전 20년, 혹은 10년 동안 꺼내지 못하고 주머니 깊숙이 넣고 다니던 상처투성이의 '돌'을 꺼내 괴물의 심장을 향해 던진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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