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KBS 사장 후보 정책발표회에 세월호 참사 추모 의미의 노란 리본을 달고 나온 KBS 양승동 사장 (사진=KBS 제공)
지난 2월 24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시민자문단과 함께하는 KBS 신임 사장 후보들의 정책 발표회가 열렸다. 시민자문단은 각 후보의 정책을 평가해 배점을 매겼고, 이 결과는 최종 면접에서 40% 반영됐다. '국민의 방송'을 자처하는 KBS에서 실질적인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 사장을 선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KBS 최고의결기구인 KBS이사회뿐 아니라 시민자문단에게 교차 검증을 거친 결과, 신임 사장에 오른 사람은 양승동 KBS PD였다. 'KBS스페셜', '인물 현대사', '추적60분' 등 다수 프로그램에서 풍부한 제작 경험을 갖춘 그는 △진실한 저널리즘 △공정한 적폐청산 △창의적 미래 전략 △시민의 KBS 4가지 키워드를 제시했고, 자신이 사장이 될 경우 정치·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하겠다고 밝혔다.
양 신임 사장은 사장 출마 당시부터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언론장악에 적극적으로 맞서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책발표회에서 그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단 유일한 후보였고, 프레젠테이션 발표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도 '파면 통보서'였다.
그는 꼭 10년 전인 지난 2008년 사원행동의 공동대표로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불법해임 사태에 저항하다 파면 통보를 받은 바 있다. 정 전 사장은 청와대, 방송통신위원회, 검찰, 국세청 등의 공세에 배임 혐의를 받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해임됐다. 국가기간방송사인 KBS 안에 사복 경찰이 투입된 2008년 8월 8일은 KBS 구성원들에게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된다. 당시 수세적이었던 노조에 반발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사원행동이었다. 사원행동은 현재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이경호, 이하 새노조)의 전신이다.
다시 한번 자신과 KBS 구성원들에게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던 양 사장은 전 정권과 맞선 전력 때문에 자유한국당 등 일부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자유한국당은 세월호 참사 당일 노래방에 간 카드 결제 내역과, 양 사장이 부산총국 편성제작국장 당시 벌어진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이 부실했다고 지적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자유한국당에 정치적 이해를 위해 사건을 이용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 사장은 지난 9일에야 정식으로 취임식을 열었다.
양 사장은 인사청문회 준비단을 통해 자신을 향해 제기된 의혹을 반박했고, 취임식 당일부터 개혁적 성향의 기자들을 보도본부 간부로 대거 배치했다. KBS는 세월호 참사 4주기인 지난 16일에는 사실을 넘어 진실을 찾는 뉴스'라는 슬로건 아래 뉴스 개편을 시도했고, 세월호 특집 프로그램, 자체 기획 연속시리즈, 검찰 부실 수사 비판 보도는 물론 자사 보도와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이 직접 비판하는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CBS노컷뉴스가 양승동 사장 취임 후 KBS의 일주일을 돌아봤다.
◇ 시청자 광장에서 모두에게 열린 취임식으로 첫 행보양승동 사장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KBS 시청자 광장에서 '봄'을 콘셉트로 한 취임식을 열었다. 보통 내부 스튜디오에서 간부들이 주로 참석해 왔던 기존 관행을 깨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를 택했다. 시청자 광장에서 열린 취임식을 한 것은 공사 창립 이래 양 사장이 처음이다.
양 사장은 정책발표회 때 공약했던 대로 'KBS 방송독립선언'을 발표했다. △KBS 주인은 오직 시민뿐이며, 우리가 할 일은 끝까지 진실을 추구해 시민에게 제공하는 것이고 △선의와 양심에 따라 취재하고 보도하고, 권력과 자본의 부당한 간섭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진실과 시청자의 평가는 겸허히 수용하며 △KBS의 주권은 시민과 시청자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시민과 시청자로부터 나온다고 밝혔다.
취임사에서 "단적인 저임금과 살인적인 노동시간, 차별적인 처우와 같은 비정규직과 외주제작사에 대한 부당한 관행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밝힌 양 사장은 취임식을 마치고 사내 비정규직들을 만났다. 계약직협회 대표 등 사내 비정규직 대표 10명과 점심을 함께 먹으며 그들이 겪는 고충을 들었다.
그는 앞서 정책발표회에서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며 불합리한 차별에 관해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양승동 KBS 신임 사장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시청자 광장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이이백 PD, 정연욱 기자와 대국민 약속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 개혁과 신뢰 바탕으로 한 인사 단행대규모 인사도 이뤄졌다. 양 사장은 지난 6일 본부장급 인사를 시작으로 19일 현재까지 총 214명의 인사를 시행했다. 특히 본부장급과 보도본부 인사에 대해서는 설명자료를 통해 인사 취지와 배경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본부장급 인사의 핵심은 '젊은 KBS'였다. KBS 최초로 사원에서 사장이 된 양 사장 본인이 50대였고 다른 간부들도 대폭 젊어졌다. 또한 무너진 신뢰도와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조직 내 혁신, 자율성, 창의성을 불어넣는 데 방점을 뒀다.
구성원들의 신뢰를 받는 개혁적 성향의 인물들이 본부장에 임명됐다. MB 정권 때 제작자율성 투쟁에 앞장서다 징계를 받은 김덕재 제작본부장, 지역 발령 등 부당인사 피해를 본 국은주 라디오센터장을 예로 들 수 있다.
보도본부 인사도 같은 흐름이었다. '개혁', '신뢰', '전문성'을 중심에 두고, 공정 언론 회복을 이뤄갈 수 있는 인물로 구성했다는 게 KBS 측의 설명이었다.
새노조의 2012년 95일 파업, 2017년 142일 파업 당시 파업뉴스 취재팀을 지휘하고 뉴스 진행을 맡는 등 중추적 역할을 해 온 김태선 보도국장(통합뉴스룸국장)과 엄경철 취재주간이 대표적이다. KBS 파업뉴스팀은 2012년에 MB 정권 민간인 사찰 문서 단독보도를, 지난해에 군 사이버사령부 댓글 공작 관련 최초 실명 폭로를 내놓은 바 있다.
대한민국 훈·포장 내역을 단독 입수해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잘못된 훈장 수여 문제를 고발한 다큐 '훈장 2부작' 방송을 요구하다 교체된 안양봉 기자는 사회1부장이 됐다. 보도국 간부들의 지속적 압박으로 결국 많이 수정된 채로 방송은 한 편만 나갈 수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최문호 기자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에 가서 보도했다.
◇ '공정성'-'정의' 내세운 뉴스 약속, 자사 비판 프로그램도 방송
지난 9일, 16일, 18일 방송된 KBS '뉴스9'에서는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 파괴를 다뤘다. (사진='뉴스9' 캡처)
KBS는 지난 16일자로 뉴스를 개편했다. '뉴스9', 주말 '뉴스9', '뉴스라인', '뉴스광장' 등 주요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를 대거 교체('뉴스라인' 이각경 앵커만 기존 유지)해 얼굴을 바꾼 것이 출발점이었다. 특히 KBS 뉴스의 트레이드마크이자 한계로 줄곧 지적됐던 '기계적 중립'을 벗어나겠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지난 13일 열린 '2018 KBS 뉴스 앵커 기자간담회'에서 앵커들은 달라진 KBS를 실감할 수 있는 보도를 선보이겠다고 강조했다. '사실을 넘어 진실을 찾는 뉴스'라는 뉴스 개편 슬로건과도 맞닿아 있다.
'뉴스9' 김철민 앵커는 "당분간은 일정 부분 편파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기계적 중립에 매몰돼 진실이 거세된 무미건조한 뉴스만 해 온 게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뉴스를 못 했다"고 말했다.
KBS '뉴스9'는 협력업체 노조 가입 동향은 물론 노조원 성향까지 담긴 삼성전자서비스 보고 문건을 단독 입수(4/9)하고, 삼성전자서비스가 노동청 근로감독관을 상시 관리해 온 정황이 포착(4/12)됐으며, 삼성전자서비스가 보안용 CCTV를 노조 감시용으로 썼다는 증언(4/16)과 삼성이 자회사의 노조 파괴 행위를 적극 지원했다는 의혹이 있다(4/18) 등 삼성 관련 단독보도를 지속해 왔다.
세월호 참사 4주기였던 지난 16일에는 오프닝을 비롯해 관련 보도를 9꼭지를 앞쪽에 배치했다. 합동 영결 추도식을 비롯해 단원고 후배들의 추모 편지, 블랙박스에 찍힌 세월호 사고 순간, 해경 처벌 실태 등을 고루 다뤘다.
'뉴스9' 앵커들은 이날 "그동안 KBS 뉴스가 공영방송으로서 시청자 여러분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점 깊이 사과드린다"며 "특히 KBS 뉴스로 상처를 받으셨던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거듭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망가진 언론의 피해자는 국민이라고 하셨던 유가족의 말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어,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정한 뉴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전달하는 정의로운 뉴스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8일 방송된 KBS '추적60분-MB 아들 마약 연루 스캔들, 누가 의혹을 키우나'와 지난 10일 방송된 '끝까지 깐다' (사진=각 방송 캡처)
보도 외의 프로그램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KBS는 '시사기획 창', 'KBS스페셜'과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세월호 4주기 특집방송을 꾸렸고, 18일 방송된 KBS2 '추적60분'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 씨의 마약 연루 의혹을 보도하며 검찰의 부실 수사를 비판하는 내용을 내보냈다.
지난 10일 방송된 KBS1 '끝까지 깐다'도 눈에 띈다. 이 방송에서는 전업주부, 작가, 대학생, 변호사,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등이 KBS 보도와 프로그램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하고 이를 KBS 기자, PD 등 구성원들이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실험을 했다.
시청자들은 관점 없이 기계적 중립에 매몰된 뉴스,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신선한 느낌이 부족한 프로그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혹사하는 제작 관행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수신료를 받는 공영방송임에도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KBS에서 시청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문제를 직시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 이례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