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남초화'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장 지난해와 올해 개봉한 상업영화 포스터만 봐도, 여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감독도 마찬가지다. 한 해에 200편 안팎으로 제작되는 한국영화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10%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여성 감독들은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만들며 관객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는 현재 한국영화 안에서 여성 감독의 위치를 묻고, 각 감독의 작가성을 탐구하는 '여성 영화감독 초청 연속강좌'를 3월부터 6월까지 진행한다. 이 중 기사화에 동의한 감독들의 강의를 옮긴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변영주 "계속 욕망하는 사람이 결국 영화를 만든다"② 이경미 "제가 보고 싶고, 되고 싶고, 꿈꾸는 여성을 그린다"③ 임순례 "여성이기에 영화 만들기 어려운 환경 벗어나길"④ 신수원 "영화로 거짓말을 할 순 없지 않나"
신수원 감독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임용고시가 생기기 전 마지막 세대로 교사가 되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재미를 느꼈지만 7년쯤 흐르자 이때를 지나면 도저히 직업을 바꾸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된 지 첫해부터 소설을 썼을 만큼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은, 휴직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하면서 조금 방향이 달라졌다. 바라던 대로 작가가 됐다면 아마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그는 바로 신수원 감독이다.
다소 늦은 나이에 영화를 접한 그는 '즐거운 우리집', '면도를 하다' 등의 각본을 썼고 2009년 '레인보우'로 장편 데뷔했다. 첫 작품으로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을 타더니, '순환선'(2012)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카날플뤼상을, '명왕성'(2012)으로 2013 피렌체 한국영화제 심사위원상-인디펜던트를, '마돈나'(2014)로 2016 피렌체 한국영화제 심사위원상-오리종티를 탔다. 지난해 선보인 '유리정원'은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고 2018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 국제판타지 각본상을 받았다.
24일 오후,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14호에서 '여성 영화감독 초청 연속강좌-신수원의 궤적'이 열렸다. 한 작품을 선보이고 다음 작품을 완성해 내보이기까지 기간이 2년 안팎으로 짧은 편인 신수원 감독. 그의 작품 세계는 물론 왕성한 창작력의 원천과 최근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거리까지 여러 이야기를 고루 들어봤다.
신 감독은 아이들을 가르치다 영화감독으로 방향을 튼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작가로 데뷔했다면 감독이 안 됐을 수도 있다"는 말처럼, 그는 파트너십을 만들 만한 감독을 만나지 못했고 마침 연출의 기회도 와서 메가폰을 잡게 됐다. 녹록지 않은 시간은 꽤 오래 갔다. 준비하는 영화가 줄곧 엎어졌고, 일하던 제작사에서 나온 시점이 하필 영화사가 줄줄이 도산할 만큼 불황기였다.
"나이는 먹어가고, 가족들한테 미안한 것도 있"던 신 감독은 자신이 겪은 이 과정을 다큐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흘 정도, 정말 미친 사람처럼 시나리오를 썼다. "이거 하나는 찍어보고 죽자. 이건 찍고 영화를 그만둬야겠다"는 각오로, 퇴직금 4천만 원으로 찍은 영화가 바로 '레인보우'다.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든 엄마와 음악 하는 아들의 파란만장 사춘기를 그렸다.
신수원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레인보우' (사진=㈜인디스토리 제공)
없는 살림으로 찍은, 첫 장편 영화였기에 신 감독은 여러 역할을 해야 했다. 각본, 감독, 음악은 물론 자신의 돈을 직접 쓰는 만큼 제작자 위치에도 섰다. 신 감독은 "'나 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게 끝일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크랭크인 하기 전에 굉장히 심했다"고 회상했다.
편집기사 손을 거쳐 편집본이 나왔을 때도 영 자신이 없었다. 보통 잘 울지 않고, 특히나 자기 작품에선 더더욱 그런 적이 없었던 신 감독은 '레인보우'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랬더니 "나도 울었어, 신 감독"이라는 편집기사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독립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상도 받은 '레인보우'는 신 감독에게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줬다. 그는 "제겐 굉장히 소중한 작품이다. 가능하다면 10주년에 '레인보우2'를 만드는 게 제 꿈"이라고 밝혔다.
'레인보우'도 경쾌하고 발랄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신 감독은 이후 작품에서 사회의 어두운 곳에 주로 자신의 시선을 내어줬다. 따돌림당하는 주인공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을 비판한 '명왕성', 중년 가장이 실직한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매일 지하철 순환선을 타는 이야기를 담은 '순환선',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해 이용만 당하고 제대로 저항도 못 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마돈나'까지.
실직한 가장 상우(정인기 분)가 구걸하던 여자가 다른 사람과 자기 아기를 바꾸는 걸 보고 싸움까지 하는 장면이 나오는 '순환선'은 사실 출산 장려를 위해 기획된 영화였다. 하지만 신 감독을 비롯해 그 프로젝트에 함께한 다른 감독들은 '홍보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전했다.
신 감독은 "출산을 가로막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느꼈다. 영화로 거짓말을 할 순 없지 않나. 억지로 미화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무겁고 다소 우울하게도 느껴지는 작품을 지속해서 선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밝은 영화를 찍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빛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어둠을 보여주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순환선'은 실제로 신 감독이 2호선 순환선을 타며 쓴 작품이라고.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순환선', '명왕성', '유리정원', '마돈나' (사진=각 배급사 제공)
신 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여성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받는 '마돈나'의 제작 비화도 들려줬다. 우연히 VIP 병동에서 일했던 분의 이야기를 듣다가 '인간의 생명조차도 볼모로 삼을 수 있는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됐단다. 원래는 돈 많은 장기 입원환자 철오(유순철 분)와 간호조무사 해림(서영희 분)가 중심이었던 영화는 뇌사 상태로 실려 오는 미나(권소현 분)과 해림의 이야기로 달라졌다.
신 감독은 '마돈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덮어뒀을 때 미혼모 관련 방송 다큐를 찍게 되었고, 그때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설에 있는 미혼모들을 만났는데, 시설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미혼모는 어떨까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상황이 연상됐다. 그래서 미나라는 인물을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큐를 취재하며 많은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따가운 시선 속에도 아이를 키우려는 젊은 여성들을 보며 저 강렬한 모성이 어디서 오는 건지 굉장히 신기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 자식을 키우는 걸 보며 미나라는 인물을 생각했다"고 밝혔다. 미나가 처한 열악한 상황 설정을 두고는 "어느 한순간 선택을 잘못했을 때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굉장히 불안한 세대이지 않나. 삶의 안전장치와 보호망이 없는 사회를 담고 싶었다"고 답했다.
시나리오 전공을 하면서도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흑심을 가졌던 신 감독은 '사탕보다 달콤한'이라는 첫 단편을 찍고 나서 영화의 재미를 느꼈다. 처음 영사하던 날 어둠 속에서 설렜던 기분이 강렬했고, 어설픈 코미디에도 웃어주고 손뼉치는 친구들을 보고 마약처럼 영화에 빠져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 마약 같은 게 무섭더라. 영화 한 번 만들어 보고 재미를 느끼니까 더 잘 만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고 전했다.
왕성한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을 물으니 "10년 동안 데뷔를 못 하면서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시나리오는 꾸준히 써 왔다"며 웃었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영화 찍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신 감독은 정작 큰 고민에 빠져있다. 작은 영화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 한국 영화계 상황 때문이다.
24일 오후,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14호에서 '여성 영화감독 초청 연속강좌-신수원의 궤적'이 열렸다. 신수원 감독(가운데)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이제까지 운 좋게, 예산이 적은데도 함께한 스태프들 덕분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데 사실 최근에는 위기감을 많이 느껴요. 한국 영화 산업 자체가 굉장히 달라지는 상황이라, 어두운 영화는 투자사에서 점점 더 기피하는 쪽으로 가지 않나 싶어요. 어둡지 않더라도 작은 영화들이 큰 영화에 밀려가는 상황이고요. '어벤져스' 극장점유율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는 570개 상영관에서 2563개 스크린을 확보했다) 이제까지는 작게라도 꾸준히 영화를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만들지 고민 중입니다.
'유리정원' 찍으면서도 판타지 장면을 하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래도 '마돈나'의 예산 2배였는데, 판타지 장면 때문에 예산 압박을 느끼면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고 포기할 걸 감안하며 찍었죠. 지금도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지만 바뀌어가는 한국의 투자 환경에서 여기에 투자해 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누구의 허락도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만 이젠 투자사의 허락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죠.
배우 캐스팅도 그렇고, 스태프 처우 개선도 해야 하지만 정부의 지원 없이는 저예산이나 독립영화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지 않을까요. 감독이나 제작자들은 30회차 찍을 걸 10회차로 줄이게 될지도 몰라요. 그럼 자기가 원하는 방식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어요. 하지만 희망을 갖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있어요. 없다면 다른 작가가 쓴 것에서 저와 맞는 지점을 찾아가며 기획 영화를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