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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19살…가족에게도 이 이야기 못해요"

사회 일반

    "5·18 때 19살…가족에게도 이 이야기 못해요"

    5·18 가두방송 차명숙 "혁시갑 채워 독방 가둬...'왜 살아야 하나' 했다"

    - 당시 만 19세,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가두방송
    - 체포 후 가혹 고문...살 터지고 어깨탈골
    - 아직도 불면증 시달려...자다가 고함도 질러
    - '조용히 살면 묻히겠지' 포기하고 싶었지만
    - 후대까지 이어질까 용기 내.. 철저히 진상규명해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19:55)
    ■ 방송일 : 2018년 5월 1일 (화) 오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차명숙 공동대표(대구경북 5.18동지회)

    [영화 '화려한 휴가' 中 /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시내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 정관용> 5. 18 배경으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 중에서 이 가두방송 부분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박신애 역할을 맡은 영화배우 이요원 씨의 목소리였죠. 그 당시 실제로 광주거리에서 가두방송을 했던 차명숙 씨. 현재 대구경북 5. 18동지회 공동대표를 맡고 계신데.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서 '하얀 속옷이 까맣게 되도록 고문당했다' 그런 내용을 밝히고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직접 목소리 좀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차명숙> 차명숙입니다. 반갑습니다.

    ◇ 정관용> 하얀 속옷이 까맣게 되도록 고문당했다는 어제 그 기자회견 내용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 차명숙> 그렇죠. 그때 당시는 모양이 무늬가 있고 그런 옷이 아니라 하얀 이렇게 속옷을 입는데 등을 무지무지하게 때렸죠. 그래서 이제 상무대에서 많이 두들겨 맞고 구타를 당하고 광주 광산경찰서로 왔는데 엎드려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계시는 조아라 회장님, 이애신 총무님이 왜 이렇게 아프냐. 이렇게 들어보니까 새까맣게 멍울이 들어 있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살이 이렇게 부르터서 이렇게 터졌어요.

    ◇ 정관용> 살이 다 터졌다?

    ◆ 차명숙> 터져서 그게 이제 피가 검정물을 입힌 거죠. 그래서 어른들이 서둘러서 많은 여성, 어린 아이들을 병원으로 이송을 시켰습니다. 그중에 저도 한 명입니다. 어깨도 탈골이 되고 어깨가 빠져서 어깻죽지라고 하나요? 탈골이 돼서 2년 정도 등 뒤로 어깨를 올릴 수 없고 그러한 가혹행위의 고문이 가해졌죠. 다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 정관용> 그렇게 고문을 당한 기간이 총 어느 정도 기간입니까?

    ◆ 차명숙> 저희가 7월 27일 정도 마무리를 한 것 같습니다, 조사 마무리를 하고 또 추가로 계속 조사를 하고 있었지만 아마 그때쯤 마무리가 돼서 미결 접수를 하는 것 같아요, 미결수로요.

    ◇ 정관용> 체포된 것은 5월 20며칠이었죠?

    ◆ 차명숙> 저희가 21일 1차 방송을 하면서 1차 발포가 나고 그다음에 이틀 정도 제가 병원으로 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시간개념과 날짜개념이 제 기억으로는 23일로 알고 있습니다.

    ◇ 정관용> 아무튼 그때부터 조사 끝나는 7월 27일까지 두 달 동안을 계속 거의 매일같이 그렇게 고문을 당하신 겁니까?

    ◆ 차명숙> 한 3일에 한 번 아니면 저녁에 놔뒀다 그 이튿날까지 조사를 받고. 상무 영창에 있었을 때는 그렇게 했습니다, 대부분 여자들은 광산경찰서로 일부 내보내고 또 내보내고 훈방조치하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한 30명... 그렇게 광산경찰서에 수감이 됐죠.

    ◇ 정관용> 38년이 흐른 어제 이 기자회견을 하시게 된 이유는 뭘까요?

    ◆ 차명숙> 광주교도소 안에서 제가 굉장한 광주교도소 측에서 저에게 다시 어떠한 행위를 한 거죠. 수갑을 채우고 다시 혁시갑을 채워서 주부 사형수들이나 어떤 자살방지하기 위해서 채우는 겁니다. 그걸 채워서 10월 2일부터 10월 30일까지 그대로 독방에다가 집어넣고 일주일에 한 번 씻을 수 있도록 풀어주고. 그래서 제가 왜 한 며칠은 이렇게 밥을 먹고 살아야 되는가. 어떤 제가 큰 개를 보면. 2살 개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목줄이 내 허리에 묶고 있었었지. 쟤가 저렇게 밥그릇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구나. 어떤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힘들었었어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 정관용> 한 달 동안이나 수갑에다 혁시갑이라고 하던데 그걸 채우면 숟가락을 손으로, 숟가락질도 못하시는 거죠?

    ◆ 차명숙> 그러니까 25cm 정도의 줄, 쇠줄을 연결해 놓습니다. 그래서 숟가락을 뜨면 거기에도 또 같이 내려가서 이렇게 같이 해야죠. 앉아서 그대로 오지는 않죠. 그런 상황에 그대로 자야 되고 또 옆으로 막 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어휴... 그래서 그러한 부분들이 여자에게 그런 가혹행위를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이게 더욱더 말하지 않으면 이 얘기가 과연 기록이 되고 알 수 있을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어떤 그런 문제를 계속 제 자신에게 던졌고요.

    ◇ 정관용> 조사과정에서 또 교도소에서도 그렇게 가혹한 행위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밝혀야 되겠다 이 말씀이시로군요?

    ◆ 차명숙> 네, 그렇죠.

    ◇ 정관용> 그 당시 19살이셨다고요?

    ◆ 차명숙> 20살이니까 만으로 치니까 만 19살이었죠.

    ◇ 정관용> 그런데 가두방송을 하실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80년 5월 당시 가두방송 중인 차명숙 씨. 차씨는 왼쪽에서 세번째. (본인 제공)

     

    ◆ 차명숙> 그때는 16일부터 17일, 18일 따라다녔어요, 어린 아이들도 다. 꼬맹이들 어르신들 다 다니면서 18일날 오전에 많은 부상자가 나서 트럭에 실려가죠. 그래서 저는 바퀴에 빨간 게 묻었을 때 '저거 페인트인가, 페인트일 거야.'

    ◇ 정관용> 그런데 피죠?

    ◆ 차명숙> 그래서 그 이후에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그거 우리도 봤다, 우리도 봤다 그러시더라고요. 아, 그게 피였던 거죠. 저희는 페인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보면서 또 따라다니고 같이 보고 물도 떠다드리고 밥도 갖다주고 빵도 갖다주고. 그렇게 계속 움직였어요, 같이 19일까지. 그러다가 이제 방송국이 타면서 또 신분이 나오지 않으면서 전화가 자유롭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엠프와 뭐랄까, 알려야 된다. 그렇게 대화가 됐었어요. 방송은 아닙니다. 알려야 된다라는. 20명, 30명, 50명 그렇게 모였어요. 여성분 남성분 다 같이.

    ◇ 정관용> 자연스럽게 거기에 합류하셔서 시민들한테 진실을 알리자는 몫을 담당하셨던 거군요, 그렇죠?

    ◆ 차명숙> 그렇죠.

    ◇ 정관용> 그리고 병원에서 또 환자들 간호하다가 체포되셨고 그 모진 고문당하고 10년형을 군사법정에서 받으셨는데 그때 죄목이 뭐였습니까?

    ◆ 차명숙> 그때는 17가지 정도였어요. 계엄군 선동죄, 유언비어, 공갈 하여튼 굉장히 많은 죄목이 많았습니다. 그밖에 포고령 (위반죄). 아주 다 기억을 할 수가 없어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때 그 모지게 고문당하신 후유증은 혹시 지금까지 없으세요? 건강하십니까?

    ◆ 차명숙> 저희가 잠을 제대로 못 자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이 있고요. 자다가 일어나서 이쪽에서 저쪽 가서 저 혼자 스스로 악을 쓰고 고함을 치고 하는데. 얼마 전에 저희 힐링캠프라고 그래 가지고 여성들이 가끔 모여서 이렇게 서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봉사해 주시는 분이 계세요, 김소희 선생님이라고 계시는데. 거기에서 잤는데, 제가 저쪽에서 잤는데 저쪽에 앉아서 보따리, 보따리 다섯 보따리를 싸줬는데 왜 나한테 달라고 하냐고 악을, 악을 막 썼나 봐요. 다 우리 여성분들이 일어나서 7명이 일어나서 이렇게도 잠을 못 자는구나, 네가. 그래서 붙잡고 울었죠.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이렇게 달래가면서 가야 되는, 같이 가야 되죠. 지금 많은 여성들이 살고 있죠. 저뿐만 아니라. 그래서 저는 지금 걸어 다니지만 부상당한 여성들은 더 힘들어요, 지금.

    ◇ 정관용> 지금까지 그 어떤 가해자 누구한테서도 사과나 이런 거 받으신 것 없죠?

    ◆ 차명숙> 없습니다. 사과를 받지도 않았겠지만 이런 부분들을 항상 우리 항상 광주 쪽의 우리 5월 가족들도 그러지만 그때 당시에 광주시민이 100만이었다면 다 피해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신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말을 안 할 뿐이지 다 피해자였어요, 그때 당시에. 그렇지만 가해자는 없지만 가해자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것도 저희 대에서 못 한다면 또 다른 후대가 계속 할 수 있어서 제가 목소리를 좀 냈습니다. 용기를 좀 내본 겁니다.

    ◇ 정관용> 이렇게 고문당하고 가혹행위 당하고 교도소조차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신 것은 뭔가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처벌할 것을 처벌해야 한다는 말씀 아닐까요?

    ◆ 차명숙> 당연하죠. 당연합니다. 그건 분명히 해야 되는데 지금 38년 동안도 어쩔 때는 그냥 이대로 조용히 있을까,그냥 조용히 살다가 죽으면 그냥 묻히겠지 그러한 포기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아직은. 정말 더 많아요. 진짜 더 많아요, 지워버리고 싶고. 그게 이제 하나의 제일 큰 정신적인 고통이고 정신적인 트라우마죠. 같이 사는 가족에게도 이런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가족도 힘들죠.

    ◇ 정관용> 그렇죠, 그렇죠.

    ◆ 차명숙> 정말 힘들죠. 우리 친정이나 가족, 내 아이들 이런 이야기할 수 없어요. 혼자, 계속 혼자 이야기하고 있죠.

    ◇ 정관용> 이제 5. 18진상규명 특별법에 따라서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 차명숙> 그러겠죠.

    ◇ 정관용> 여기는 좀 기대가 되세요, 어떠세요?

    ◆ 차명숙> 기대 크게... 그래도 생긴다는 그 자체는 희망적이고요. 또 얼마큼 기록이 잘못됐든 잘 기록이 됐든 그것도 중요하지만 얼마큼 더 밝혀나갈 수 있을지 사실은 그런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죠. 사실은 더 큽니다, 마음이. 그래도 응원은 해야겠죠.

    ◇ 정관용> 응원해야죠.

    ◆ 차명숙> 네, 응원하고 또 바라야겠고 앞에서 하시는 분들에게 용기는 줘야겠지만 그냥 항상 그렇죠, 저희 마음속에서는.

    ◇ 정관용> 너무 오랜 세월 묻혀 있었기 때문에... 참... 알겠습니다.

    ◆ 차명숙> 그래서 이제 제가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만들기 위한,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그런 부분들이 보였던 것 같고 하여튼 그렇습니다. 짧은 시간에 말씀을 다 드릴 수가 없고요. 어쨌든 그렇네요.

    ◇ 정관용> 아무튼 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지금 생긴 겁니다, 우리 차명숙 대표님의 말씀으로 말이죠. 오늘 귀한 말씀 잘 들었고요. 참 오랫동안 너무 힘들고 어려운 그 삶, 저희들이 돌봐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 차명숙> 아닙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 정관용>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차명숙> 수고하셨습니다.

    ◇ 정관용> 현재 대구경북 5. 18동지회 공동대표 맡고 계신 차명숙 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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