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노컷뉴스

故 박환성 PD 유족, EBS 임직원 고소 "업무방해, 명예훼손"

미디어

    故 박환성 PD 유족, EBS 임직원 고소 "업무방해, 명예훼손"

    정부 지원금 일부 환수-촬영분 시사 요구… "엄청난 모욕"

    지난해 7월 14일, 남아공 현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故 박환성 PD. 그는 출국 전 '간접비' 명목으로 제작지원금 일부를 환수하는 방송사의 불공정 관행을 폭로했다. (사진=한국독립PD협회)

     

    지난해 7월, EBS에서 방송 예정이었던 자연 다큐멘터리 '야수의 방주'를 촬영하기 위해 박환성 PD와 김광일 PD가 남아공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죽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현지 코디네이터를 쓸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직접 운전하다, 마주 오던 운전자의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기 때문이다.

    박환성 PD(블루라이노픽쳐스 대표)는 출국 전 자신의 '갑'이었던 EBS의 제작비 환수 관행을 폭로한 바 있다. EBS에 2억 1천만 원의 제작비를 요청했으나 EBS는 1억 4천만 원만 지원해, 그는 한국전파진흥협회(RAPA) 창작지원금 공모에 나서 1억 2천만 원의 지원금을 탔다. 그런데 EBS가 '외주제작사 상생 협력방안' 기준에 따라 지원금의 40%인 4800만 원을 간접비로 요구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EBS는 △박 PD가 제작지원을 신청할 때 EBS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고 △간접비 40%를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

    박환성-김광일 PD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인해 독립PD들의 노동 조건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잠시 주목받았다. 이들이 안전 대신 비용 절감을 택한 근본적인 배경에는 방송사-독립제작사(자) 간 불공정 계약이 있다. EBS, MBC, CJ E&M 등 방송사들이 외주제작사와 상생하는 방안을 앞다투어 내놨지만, 편성권과 제작비 지급 권한을 지닌 방송사가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는 EBS가 박환성 PD와 거래하면서 지위 남용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2일 박환성 PD의 동생 박경준 씨(현재 블루라이노픽쳐스 대표)에게 회신 된 공정위 문건의 내용은 크게 2가지다.

    EBS가 RAPA와 맺은 제작지원 협약서상 저작권을 모두 EBS에 양도하는 내용으로 수정하라고 한 것은 '경제상 이익 제공을 강요하는 등 거래상 지위 남용행위를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제작지원금 40% 환수에 대해서는 간접비를 강요할 만한 정황이 없다는 것이었다.

    11개월 만에 나온 공정위의 답변에 '무성의하다', '조사 의지가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선, 방송사-독립제작사(자) 간 존재하는 뚜렷한 위계질서를 고려하지 않은 데다, 박환성 PD와 EBS 관계자 사이에 오간 이메일, EBS의 계약 변경 요구서, 주고받은 공문 등 다양한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일부 문자메시지만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2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회관에서 블루라이노픽쳐스, (사)한국독립PD협회, 언론개혁시민연대가 공동 주최한 '故 박환성 PD가 제기한 EBS의 불공정행위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박환성 PD의 동생 박경준 씨가 운영하는 블루라이노픽쳐스의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집현전은 이날 EBS 임직원 2명을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피소된 두 사람은 당시 콘텐츠협력제작부장이었던 최모 씨, 콘텐츠협력제작부 직원 유모 씨다. 집현전은 지난달 30일 소장을 의정부지방검찰청 고양지청에 제출했다.

    2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회관에서 블루라이노픽쳐스, (사)한국독립PD협회, 언론개혁시민연대가 공동 주최한 '故 박환성 PD가 제기한 EBS의 불공정행위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우선 업무방해에 대해서는 EBS가 박 PD에게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 방송 제작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EBS에 귀속시키려는 요구를 거절하자 박 PD에게 '계약해지 사유'라며 촬영 원본, 지출 내역 영수증 제출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EBS 측의 압박은 박 PD의 제작활동을 저해하는 요소가 됐고, 자칫하면 프로그램 납품 기일까지 늦어질 수도 있었다. 결국 박 PD는 프로그램의 완성도와 납품기일 준수, 피고소인들의 방송사에 대한 영향력을 우려해 RAPA 지원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BS가 허위사실을 기재한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명예훼손 혐의가 있다고 봤다. 박 PD가 부정한 방법으로 지원금을 받은 것처럼 묘사했고, 유족들의 사과 요구도 거절했다는 것이 요지다.

    박경준 씨는 EBS가 고인에게 '위력에 의한 갑질'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드시 욕설 또는 폭언이 동원돼야 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적, 심리적 압박도 그에 못지않은 갑질이라고 본다. 유족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때 욕설 듣고 폭행을 당해 계약이 어그러져 남아공에 안 갔다면 사고가 안 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씨는 "남아공 떠나기 전에 남긴 글을 보면 딱 한 가지 후회한 내용이 있었다. EBS에 모든 저작권을 넘기는 계약을 한 것인데, 다른 선택사항이 있었을까. 없다고 생각한다"며 "사과도 사과지만 정확하게 진상 조사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전했다.

    한국독립PD협회 송호용 회장은 "이번 공정위 결정은 방송사-제작사가 수평적 관계라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철저한 갑을관계에 따른 수직적 위계 구조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기계적인 판단을 했다. 공정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송 회장은 "실제 제작비보다 적은 제작비를 책정해 놓고 모든 저작권을 방송사에 귀속하는 조항이 있는, 그야말로 약탈적인 계약"이라며 "공정위의 이번 결정은 대한민국 방송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확인해 준 꼴"이라고 비판했다.

    (사진=한국독립PD협회)

     

    한국독립PD협회 한경수 대외협력위원장 역시 "서로 약속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제대로 (방송)되게만 하면 된다"면서 "방송 직전의 가편집본이면 몰라도 촬영본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이나 영수증 가져오라 하는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자 괴롭힘이다. (공정위는 이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고 부연했다.

    EBS와 한국독립PD협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언론개혁시민연대의 김동찬 사무처장은 공정위의 조사 범위가 지엽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 요구한 제작비보다 적은 제작비를 주고 간접비 명목으로 제작비를 회수하는 게 당연시되는 불공정 관행은 건드리지 않고 오직 '계약서 수정의 위법성', '간접비 납부 강요'만 다뤘다는 게 문제라는 설명이다.

    김 사무처장은 "박 PD가 계약을 위반했고, EBS는 간접비를 요구한 적이 없다는 EBS 입장과 다를 게 없다. 이는 고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며 "더구나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워 법 위반에 대한 판단이 불가하다'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런 회신문이 작성된 경위가 반드시 확인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집현전의 김용호 변호사는 "(박 PD-EBS 간 계약은) 법적으로 도급계약이다. 계약 목적은 완성본을 주는 데 있다. 과정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위력으로 기존에 행해지지 않은 요구사항을 지속한 것은 업무방해죄의 요건도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가) '심사절차종료' 처리를 했기 때문에 최종 판단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고소 사건이 조사되는 과정에서 집적된 자료를 활용해 다시 한번 공정위에 제소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 시각 주요뉴스


    실시간 랭킹 뉴스

    노컷영상

    노컷포토

    오늘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