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받지 않겠습니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술가의 집. 박근혜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대표적 기관으로 꼽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관계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사과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인 피켓과 과일 '썪은 사과' 10여 개가 놓여 있었다. 예술위로부터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혀 검열과 지원 배제 등을 당한 예술인들의 분노 표시였다.
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 실행자 처벌과 조직의 변화 등이 동반되지 않으면, 사과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2015년 제36회 서울연극제 대관 탈락 사건 당시 서울연극협회 회장이었던 박장렬 연출의 말이다.
"지난 4년 동안 예술위는 아무런 사과도 없었다. 정부가 바뀌니까 사과를 한다. 사과가 아닌 사죄를 해야 한다. 죄를 지었다는 인식을 당당히 표현해야 하고 왜 침묵했는지도 정확히 이야기해야 한다."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고 밝힌 김현진 전 아르코미술관 관장은 "예술위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예술인 현장 실무자를 길들이려는 행태를 반복해왔다"며 "예술위의 이런 뿌리 깊은 병폐가 블랙리스트 사태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블랙리스트 사태에서 조직(예술위) 내부는 반성의 의미로 어떤 조치를 취했나"라며 "사과는 명확한 제스처가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극단 그린피그의 윤한솔 연출은 "블랙리스트 부역한 분들이 단 한 명도 사퇴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며 "언제까지 이런 이벤트를 봐야 하는가. 실질적인 사과는 조직을 개혁하는 노력이다"고 문제제기했다.
전윤환 극단 엔드씨어터 대표도 "검열을 실행한 실무책임자인 사무처장이 아직도 그 직책을 유지하고 있다"며 "예술위의 변화를 지켜볼 생각도 없고, 응원할 생각도 없고, 사과도 받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술위는 이날 사과문을 통해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중추기관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고 블랙리스트 지원배제라는 참담한 과오를 저지른 것에 대한 현장 예술인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날 현장에는 최장주 예술위원장 직무대행을 비롯해 예술위 위원들과 임직원들이 참석했다.
다음은 사과문 전문.
반성과 혁신으로,국민과 예술인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나겠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원회)는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중추기관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고 블랙리스트 지원배제라는 참담한 과오를 저지른 것에 대해 현장 예술인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를 예술인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예술현장의 동반자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예술위원회의 출범은 예술지원정책 수립에 있어 자율성과 독립성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술위원회는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였고 부당한 지시를 양심에 따라 거부하지 못하였으며 반헌법적 국가범죄의 공범자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현장 예술인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드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보고 분노와 황망함을 겪으셨을 모든 분들께 어떤 식으로 사과드리더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예술위원회는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공연예술 창작산실’, ‘아르코예술극장 대관(서울연극제)’ 등 문예진흥기금사업 심의과정에 개입하여 블랙리스트 예술인과 단체들을 지원대상에서 배제하였습니다. 당시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진행과정에서 문체부의 요구에 따라 사업별 지원신청 접수내역, 심의위원 명단 등을 보고하였으며, 이후 문체부로부터 절대 지원해서는 안되는 ‘지원배제명단’을 유선전화 또는 대면 등의 방법으로 통보받았습니다. 당시 문체부는 지원배제 지시에 대해 거부하거나 불이행 시 해당 사업을 중단하거나 폐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고, 이에 당당히 맞서야 함에도 우리 예술위원회는 정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지원배제를 이행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지난 1973년 문예진흥원 출범부터 줄기차게 추구해온 문예진흥의 원칙을 스스로 어기는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을 시인합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이번 발표를 조사의 끝이 아닌 예술위원회의 공공성과 신뢰를 회복하는 시작으로 삼겠습니다. 예술위원회는 현장예술인과 국민 여러분께 드린 상처를 치유하고 이와 같은 비극적 사태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하겠습니다. 많이 미흡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예술위원회는 그 출발점으로 옴부즈만제도 도입 등 기존 지원심의제도를 개선하였고, 지원심의 운영과정에 폭넓은 현장의견 수렴 및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개편된 심의제도에 따라 올해 지원사업 심의를 추진한 바 있습니다.
또한 예술위원회는 지난 1월, 블랙리스트 피해자를 포함한 외부 민간위원, 새롭게 출범한 6기 신임위원, 그리고 사무처 직원들로 구성된 ‘아르코 혁신TF’를 발족하였습니다. 그간 아르코혁신TF에서는 블랙리스트 사태에서의 과오를 객관적으로 되짚어 보고 예술위원회의 올바른 역할 정립을 위한 혁신방안을 모색해오고 있습니다. 기관 운영 혁신의 첫 걸음으로 현장예술인을 중심으로 5개 소위원회를 개편하였으며, 소위원회를 통해 참여와 소통을 확대할 것입니다. 앞으로 현장과의 보다 확고한 소통을 통해 예술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고 예술현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단계적 혁신안을 마련하여 시행하겠습니다.
“예술은 자유로운 감수성에서 태어난 것이기에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합니다.”
출범선언문의 첫 문장에서 밝힌 중요한 가치를 지난 몇 년간 예술위원회 스스로가 심각하게 훼손한 점은 돌이킬 수 없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오늘의 반성과 성찰 또한 그간의 과오에 대한 속죄로서 이미 늦었고 너무나 미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상규명과 혁신을 위한 앞으로의 모든 과정을 예술현장과 함께 추진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문예진흥기금을 운용함에 있어서도 국민과 예술인들이 주인임을 명심하고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부당한 청탁에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만이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나아가겠습니다. 이번 과오를 거울삼아 어떠한 권력이나 압박에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힙니다.
저희들은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예술현장의 진정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면목 없고 송구스럽지만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다면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끝으로 예술위원회의 블랙리스트 실행에 대한 책임은 5월 하순 진상조사위원회가 발표하는 권고안을 적극 수용하여 국민 여러분과 현장예술인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조치를 취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다시 한 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고통을 받으신 국민과 모든 예술인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2018년 5월 17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