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창문 열고 살고 싶다. 별생각 없이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특권이다.'
토요일인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 이 같은 문구의 피켓을 든 여성 인파가 운집했다. 붉은 옷의 인파는 혜화역 2번 출구부터 이화사거리까지 약 500m를 가득 메운 규모였다.
이 집회는 남성이 피해자인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몰래카메라)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편파적이라고 성토하면서 대다수의 몰카 범죄가 피해자인 여성을 위협하고 억압한다는 사실을 공론화하기 위한 자리였다.
10일 집회 주최 측인 '불편한 용기'에 따르면 9일 시위에 모인 최종 인원은 2만2천명에 달했다. 지난달 19일 1차 시위 때 1만2천명보다 1만명 늘었다. 여성이라는 단일 의제로 열린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 기록을 또 경신했다.
집회의 안전과 교통 관리를 위해 시위 규모를 파악하는 경찰도 1차 시위 때 1만명보다 1.5배 늘어나 1만5천명이 모였다고 집계했다.
경찰은 1차 시위 때 주최 측이 "최소 8천명이 모일 것"이라고 예고했는데도 '많아야 500∼700명'으로 예상했다가 당일 집회 관리에 차질을 빚은 바 있다. 2차 시위도 경찰은 애초 1만명으로 추정했으나 역시 예상은 빗나갔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집회 인원 추산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혜화역 여성시위를 바라보는 관점과 맞닿아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불법촬영(몰카)으로 다시 한 번 사회적 화두가 된 여성안전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와 분노의 크기를 우리 사회와 남성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들은 한국 사회 전반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문제를 인식한 사람과 인식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 간극이 커서 사회 변화에 지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인종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지체현상이 해결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면서 "(혜화 시위처럼) 새로운 방식의 연대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가 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분명히 갖췄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다"고 말했다.
혜화역에서 열린 두 차례 시위를 본 남성들의 시선은 차가워 보인다.
여성들이 호소하는 불법촬영·성폭력 문제에 대한 공감도 일부 있었지만, 시위 방식이나 표현을 놓고 불편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특히 1차 시위와 달리 2차 시위 때 일부 참가자의 '삭발식'이 진행되자 "과격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더해졌다.
남성 이용자가 많은 커뮤니티나 포털사이트 댓글 공간에는 '여성 문제를 얘기하려면 군대에 다녀와서 얘기하라' 등 감정적인 글이 자주 올라왔다. 혜화역 시위 사진을 올려놓고 참가자들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희롱하는 게시글도 다수 발견됐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보통 '과격시위'라 하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있는 시위를 뜻하지 않느냐"면서 "혜화역 시위를 과격하다고 하는 건 '여자가 어떻게 저렇게 험한 말을 하느냐'는 식의 접근"이라고 지적했다.
윤김 교수는 "군대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의도적으로 논지를 흐리는 전략"이라면서 "불법촬영물을 찍어 올리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도 '남성 연대' 구조에 가담하는 것인데, 이를 부인하는 건 '성범죄를 볼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