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3김(3金,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중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김종필(JP‧1926~2018) 전 국무총리가 23일 서거했다. 향년 92세. JP는 박정희, 김대중 정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우리나라 정치사의 증인이었다.
JP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3당 합당과 DJP연합이다. 1990년 신민주동화당 총재 당시 6월 민주항쟁 이후에도 정권을 잡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제안 받은 3당 합당을 수용했다. 노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 결합된 민주자유당은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의 뿌리다.
그는 민자당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다. 14대 대선을 앞두고는 YS와 경쟁했고 YS가 당선된 뒤에는 갈등이 불거졌다. 1995년 민자당 내 민주계에 밀려 퇴진, 자유민주엽합을 창당했다.
1997년 제15대 대선을 당시에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손을 잡아 이른바 'DJP 연합'으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DJ의 국민의 정부 초대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을 지낸 뒤 정식 총리에 임명됐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남북관계 등에서 DJ와 대립했던 끝에 2001년 DJP 연합은 붕괴됐다.
2004년 총선에서 자민련 비례대표 1번으로 공천되며 10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한 뒤 9선 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는 YS와 함께 최다선 기록이다. 자민련 이후 이회창 전 총재의 자유선진당 등 충청 지역 기반 정당이 만들어졌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JP가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것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에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참여하면서였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 씨의 맏사위였다. 부인 박영옥 여사는 지난 2015년 별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겐 사촌 형부다. JP는 박 전 대통령이 탄핵 당시 그의 성격에 대해 육영수 여사의 안 좋은 점을 닮았다고 언급해 파장이 일었었다.
JP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했다가 육사 8기생으로 재입학했다. 1960년 중령으로 강제 예편됐으나 이듬해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뒤 현역에 복귀했고 이후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 됐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해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에 앞서 1962년부터 한일협정 협상 담당자로 교섭을 담당했다. 1965년 6월 기본조약 조인에 앞서 1964년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박정희 정권은 비상 계엄을 선포해 반대 목소리를 탄압했다.
JP는 후일 한일협상에 대해 "내가 이완용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새우록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견제를 받아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1972년 10월 유신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1971년부터 75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명실상부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한달 뒤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됐고, YS, DJ 등과 유력한 차기주자로 부상했다. 이후 1980년 5‧17 쿠데타로 전두환의 탄압을 받은 뒤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했다.
1987년 정계에 복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2월 13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4위에 그쳤다. 2004년 정계 은퇴할 때까지 충청의 맹주로 평가받았고,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의한 대선정국에서 한때 충청이 고향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부각되면서 그 위상이 재조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