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대한민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2대 0으로 승리한 대한민국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카잔(러시아)=CBS노컷뉴스 박종민 기자
두 팀 모두에게 유일한 1승이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축구대표팀은 지난 28일(이하 한국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조별리그 F조 3차전에서 독일을 2대 0으로 격파해 전 세계를 놀래켰다. 이튿날인 29일에는 폴란드가 러시아 볼고그라드 아레나에서 열린 같은 대회 조별리그 H조 최종전에서 일본을 1대 0으로 꺾었다.
라이벌 한국과 일본의 16강 진출 여부가 걸렸던 만큼, 이 두 경기는 축구 팬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제국주의 열강에게 핍박받은 역사를 지닌 한국과 폴란드가, 서로를 대신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과 일본을 차례로 무너뜨렸다는 상징성을 찾을 수도 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 국가 대항전은 '유럽의 한일전'으로 불린다. 그간 한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익히 봐 왔던 격렬한 정서 충돌이 독일과 폴란드 전에서도 경기장 안팎으로 들끓는 까닭이다.
풋볼리스트 류청 축구전문기자는 29일 CBS노컷뉴스에 "유로2008(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당시 조별리그 독일과 폴란드 경기에서 (독일 공격수) 포돌스키가 골을 넣었을 때 폴란드 사람들은 '조국에게 골을 넣었다'고 분노했다"며 "포돌스키는 폴란드계 독일 사람인데,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좋지 않은 감정이 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 기자는 "폴란드는 (지리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오랜 기간 핍박받아 왔기 때문에 이 두 나라와 경기할 때는 한일전처럼 격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계 피아니스트의 삶을 통해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서 벌인 참상을 드러낸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작품 '피아니스트'(2002). 이 영화로도 널리 알려졌듯이 폴란드 역사는 36년 동안 일제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역사가 심용환은 같은 날 "폴란드는 분할의 역사를 지녔다"며 "절대군주 시대부터 제국주의 시대까지 국경을 맞댄 열강 독일과 러시아가 두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를 분할했으니 이 두 나라에게 원한이 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 "한국과 폴란드, 장기 지속적인 탄압 받았다는 공통점 분명하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러시아 볼고그라드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H조 일본과 폴란드 경기에서 일본 선수들 모습. (사진=노컷뉴스/gettyimages)
심용환은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으로 촉발됐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역시 폴란드에 있다"며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식민지배를 단일하게 받았고, 폴란드는 100~200년 동안 사건만 터지면 억압을 받았다는 맥락상 차이는 다소 있더라도, 장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는 공통점은 분명하다"고 부연했다.
"로맹 가리(1914~1980)가 쓴 소설 '유럽의 교육'을 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했던 폴란드 빨치산과 농민들의 처절한 삶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일제시대를 겪은 우리가 일본에게 느끼는 치가 떨리는 감정을 폴란드 역시 독일에게 갖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이, 전쟁 이후 걷고 있는 전혀 다른 길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지난 1970년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1913~1992)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기념비를 찾아가 무릎 꿇은 모습이다.
심용환은 "독일이 전쟁범죄에 대해 철저히 사과하면서 일본보다 훨씬 책임 있는 태도를 견지하고는 있다"면서도 "하지만 폴란드 등 피해 당사국의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 우리가 일본에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게 진행되는 것"이라고 봤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전범 세력이 정권을 계승한데다, 1990년대 초반 사회당 전성기를 통한 개혁 정치 분위기가 반짝 했다가 사라진 뒤에는 극우정치가 완전히 자리잡았다"며 "냉정하게 말했을 때 현재 총리 아베가 물러나더라도 일본이 개혁될 수 있을까를 보면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을 이긴 날 독일 현지에서 이 경기를 본 한국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위기가 좋지 않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독일 사람들이 '축하한다' '잘하더라'라는 말을 건네더라면서 '이런 게 선진국 자세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며 "이를 접하면서 (철저한 자성과 사과를 통해) 문화를 축적해 온 독일과 그렇지 않은 일본의 태도 차이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