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권력과 성(性)이 뒤섞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혐의 사건 재판이 세간의 첨예한 관심 속에 진행 중이다.
그가 휘둘렀다는 '업무상 위력'의 실체를 입증하려는 검찰과 이를 막아내고 결백을 주장하려는 안 전 지사 간 공방이 갈수록 치열한 가운데 재판도 어느덧 후반을 향해 치닫고 있다.
15일 서울서부지법에 따르면 이 법원 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지금까지 공판준비기일 두 차례, 공판기일 다섯 차례 등 총 7번의 재판을 진행했다.
이 사건의 기본 구도는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지난달 15일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에 검찰과 안 전 지사 쪽이 기본 주장을 확인하고 입증 계획을 밝히면서 모두 제시됐다.
검찰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권력형 성범죄"라고 규정했다. 안 전 지사가 업무상 자신의 감독하에 있던 전 충남도 정무비서 김지은 씨를 위력을 이용해 간음했다는 것이다.
안 전 지사 측은 "그런 행동(성관계) 자체는 있었지만, 의사에 반한 것이 아니었고 애정 등의 감정하에 발생한 것"이라며 "검찰이 주장한 위력은 존재하지 않고, 위력이 있었더라도 성관계와 인과 관계가 없으며, 성범죄 의도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각 행위나 반응, 위력의 구체적 내용, 피고인이 위력을 어떻게 이용했고 피해자가 어떻게 의사제압을 당했는지를 볼 것이라며 앞으로 이런 부분에 집중해 변론을 펼칠 것을 양측에 당부했다.
또 "피고인의 방어권을 행사하는 범위를 넘는 근거 없는 풍문 등에 의한 사생활 침해 변론은 제한하겠다"며 "피해자에 대한 힐난성 신문도 불허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막상 재판에 들어가자 근거가 빈약한 풍문이나 피해자 또는 증인에 대한 힐난성 신문이 종종 이어졌다.
◇ 안희정의 '업무상 위력' 법정공방 업무상 위력은 물리적으로 표현하거나 계량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런 추상적 개념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했는지 밝히려는 시도는 평소 안 전 지사가 대선 경선캠프나 도청에서 보인 모습을 확인하는 데 집중됐다.
검찰 측 증인들은 "안 전 지사는 조직 내 왕 같은 존재였다", "안 전 지사의 캠프는 선배들의 성폭력이나 폭력 등이 자주 일어나는 억압적·권위적 분위기였다", "안 전 지사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그가 나타나면 주변이 위축됐다", "주변에 '예스맨'만 있었다" 등 증언들을 내놨다.
안 전 지사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민주적·수평적 면모 대신 권위적·일방적으로 행동해 그의 말을 거스르기 어려웠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금기였다는 주장이다.
피고인 측은 김 씨 후임 수행비서, 전 비서실장, 안 전 지사 부인, 도청 공무원 등 안 전 지사 측근들의 증언을 통해 이와 상반되는 주장을 내놨다.
이들은 "안 전 지사가 화를 내거나 호통친 일은 없다", "캠프 내 성폭력·폭력은 보거나 들은 적 없다", "실수해도 가볍게 지적한 다음 나중에 챙겨줬다", "일이 끝나면 '고맙다, 애썼다' 등 격려해줬다", "고압적이라든지 무리하게 일을 시킨 적이 없다" 등의 얘기를 쏟아냈다.
검찰 측과 피고인 측 증인들이 상반된 경험담과 인상, 평가를 제시한 것은 각자의 체감과 경험치가 다른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지은이라는 고소인에 대한 범죄 혐의를 이유로 제기된 만큼 김 씨가 자신에 대한 안 전 지사의 평소 태도, 직접 느끼거나 경험한 바를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일관되게 진술했는지가 재판부 판단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가 날을 넘겨 이튿날 새벽까지 총 16시간 가까이 이어진 지난 6일 제2회 공판기일 전체를 김 씨에 대한 비공개 피해자 증인신문에 할애하며 실체 파악에 공을 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 '김지은은 도대체 누구인가'…공개재판 통한 폭로전 이번 사건 재판이 기일을 거듭할수록 김 씨가 평소 어떤 사람이었고, 행실이 어떠했으며, 어떤 이성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커지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2차 피해 우려도 나온다.
공판준비기일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이 "(김 씨에겐)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여러 태도, 행동, 객관적 정황이 있었다"며 이와 관련한 관련한 신문을 예고할 때부터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실제 피고인 측 증인들은 "성폭력이 있었다는 시점을 전후해 김 씨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찬 메시지를 보냈다", "다른 직원한테 당한 성추행은 잘 털어놨다" 등 김 씨의 '피해자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법한 증언을 여럿 했다.
김 씨가 안 전 지사를 흠모했거나 이성으로 좋아했다는 진술도 이어졌다. 안 전 지사 부인 민주원 씨가 "김 씨는 제 남편을 위험에 빠뜨릴 사람 같았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검찰 측 증인들은 "김 씨 별명은 '일의 노예'였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쓰레기통이나 간식 통도 김 씨가 챙겼다" 등 김 씨의 성실한 업무 자세를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김 씨의 업무 태도에 대해선 일부를 제외한 피고인 측 증인들도 같은 의견을 냈다.
피고인 측 증인 진술 중에는 사실관계보다 느낌, 개인적 평가, 전해 들은 이야기에 과하게 의존하거나 김 씨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재판부의 제지를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검찰도 무리한 반대신문이나 증인과 언쟁을 벌이는 듯한 질문으로 제지를 받기도 했다.
다만 공개 증언한 증인이 피고인 측은 7명인데 검찰 측은 2명에 그친 점에서 보듯 피고인 측의 공개 증인신문 분량이 더 많았다. 이에 따라 김 씨 측이 "2차 가해"라고 주장할 만한 내용도 더 많이 공개됐다.
◇ '세기의 재판'…이달 중 마무리, 내달 선고할 듯 안 전 지사 사건은 지난 3월 5일 김 씨의 최초 폭로 때부터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의 성 스캔들'이라는 점에서 폭발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관심을 받았다.
안 전 지사는 올해 초부터 한국 사회를 강타한 '미투 운동' 가해자로 지목된 이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재판 시작 후엔 안 전 지사 측이 검찰 측 증인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며 증인을 모해위증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고, 김 씨 측은 "전형적인 성범죄 역고소이자 본보기 응징"이라고 비판하는 장외 공방도 벌어졌다.
재판부는 이목이 쏠린 이번 재판을 7월 중 집중 심리해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15, 22일 두 차례 공판준비기일 이후 이달 2, 6, 9, 11, 13일 등 다섯 차례 공판기일을 진행하는 강행군을 펼쳐다.
재판부는 오는 16일 제6회 공판기일을 열어 비공개 증인신문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어 23일이 제7회 공판기일로 예정돼 있으나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이날 피고인 안 전 지사에 대한 신문이 이뤄질지, 검찰이 구형량을 밝히는 결심이 이뤄질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재판부는 극도로 민감한 이번 사건의 성격을 감안해 이달 중 결심 공판이 진행되더라도 조금 더 숙고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신중하게 선고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