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해온 진보정치의 대표 정치인", "노동자의 벗, 진보의 상징".
고(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를 추모하는 노동계의 위와 같은 묘사는 1980년대 노동운동에 발을 들인 이후 약 40년 가까이 노동자·약자를 위한 진보정치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그의 생애를 잘 보여준다.
노 원내대표의 정치인생은 시작부터 노동운동으로 다져졌다. 경기고와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교내 시위를 주도했던 노 원내대표는 1982년 대학 졸업장 대신 용접자격증을 들고 인천의 용접공으로 노동운동에 나섰다.
'위장취업'과 뒤이은 7년여의 수배생활을 거치면서 노 원내대표는 경인 지역의 위장취업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중도 성향 노동 조직인 '인민노련'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노 원내대표는 1992년 석방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노동당 설립에 헌신했고, 노 원내대표도 2004년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노 원내대표는 굵직한 노동 이슈를 다루는 집회 현장을 빼놓지 않고 직접 발품을 팔며 노동자들의 곁에 앉았다.
특히 2009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복직 투쟁과 쌍용차 복직 투쟁, 2011년 7월 한진중공업 구조조정 등의 사안에는 심상정 등과 함께 직접 단식농성을 벌이며 사태 해결을 호소하는 등 첨예한 노사쟁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노 원내대표의 의정활동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2004년 노 원내대표를 비롯해 '뱃지'를 가슴에 달은 민노당 의원들이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가장 먼저 발의한 법안은 비정규직 차별철폐 법안이었다.
이후에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명문화, 기간제 노동 제한, 파견법 폐지 및 불법 파견 금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등 당시 노동계 최대 현안을 총망라한 '노동4법' 개정안을 연달아 내놓았다.
당시에는 민노당 내부에서도 실제 법제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던 노동 이슈들이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 법안에 반영돼 어느새 노사 현장의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선 후 주로 법사위, 정무위에서 활약했음에도 노 원내대표의 노동 전문성은 꾸준히 빛을 발했다.
2004년 삼성SDI가 노조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노동자 10여명을 불법복제한 휴대전화로 위치추적했다는 의혹과 함께 검찰의 삼성 비호 논란이 일자 이듬해 2월 노 원내대표는 '삼성SDI 불법위치추적 특검법안'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
3선 의원이 된 20대 국회에서도 노 원내대표의 노동자를 위한 정치는 계속됐다.
방위사업체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노조법 개정안, 고령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산재 조사 과정에 재해 당사자인 노동자를 참여하도록 명시하는 산재보상법 개정안 등 굵직한 노동법안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강연료 등 금품을 받은 의혹이 노 원내대표의 발목을 잡으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했던 노 원내대표의 정치 역경은 아쉬운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