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순 8집 재킷 [페이지터너 제공]
가수 장필순은 지난 1년을 보내고서 이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란 게 참 기특하구나…."
지난해 8월 그의 음악적인 기둥인 조동진이 세상을 떠난 뒤 상실감에 요동치고 가슴을 짓누르던 감정이 점차 잔잔해졌기 때문이다. 오는 28일은 그가 속한 1990년대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의 버팀목, 조동진 1주기다.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이 가능했던 것은 음악을 작업하며 보낸 시간 덕이다.
그는 최근 8집 '수니 8-소길화'(soony eight-소길花)를 내놓았다. 2013년 선보인 7집 '수니 7'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정규 앨범이다. 2015년 4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선보인 연작 싱글 10곡에 신곡 2곡을 더했다. 앞서 그는 자신이 사는 제주 애월읍 소길리에 '꽃 화'(花)를 붙여 '소길 1화'부터 '소길 10화'까지 10곡을 내놓았다.
제주에서 전화로 만난 그는 "형님(조동진)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가 많아서, 제겐 녹음 과정이 위로가 됐다"며 "형님이 제게 마지막으로 써준 가사, 우리가 그리워하며 만든 곡들이 담겨 형님에게 따뜻한 이별 인사를 건네는 앨범이 됐다"고 말했다.
"저도 제 생활 패턴과 아집이 있어 생전 형님의 모든 모습이 멋있지는 않았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각기 자존심과 가치관의 무게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분이 떠나고 나니, 제가 눈여기지 않은 것들, 귀 기울이지 않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음악을 했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걸 이해하게 됐죠. 그래서 더 보고 싶어요."
신곡인 타이틀곡 '그림'은 조동진의 두 동생인 조동익이 작곡·편곡하고 조동희가 가사를 썼다. 이 곡에선 장필순의 나지막한 한숨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 시간 동안 날 지켜준/ 그대의 노래는 바람처럼/ 우리가 그리던 저 그림 속으로'. 이들의 풍경 안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진 조동진을 떠올리게 하는 몽환적인 전자음은 뭉근한 따스함을 안긴다.
장필순은 "동익 선배의 출중한 편곡 덕에 전자음이 따뜻하게 표현된 것 같다"며 "내 보이스 컬러가 거칠지만 힘이 강하기보다 퍼지는 소리여서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는 내 목소리가 휘는 연한 철사 같다고 했다"고 말했다.
앨범에는 조동진의 여운이 트랙 사이사이 깃들었다. 첫 곡 '아침을 맞으러'는 1994년 영화 '장미빛 인생' OST 곡으로, 조동익이 만든 곡에 조동진이 처음 가사를 써준 노래다. 장필순이 새롭게 부르면서는 마치 아침의 고요함 속에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듯 사운드의 여백을 크게 두고 1절만 가창했다.
장필순은 "이 노래를 연극의 서막, 책의 머리글처럼 앨범을 여는 에필로그로 담고 싶었다"며 "노래가 앨범 전체의 느낌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고 소개했다.
'저녁 바다' 역시 한동안 제주에 산 조동진이 생전 마지막으로 장필순에게 가사를 선물한 노래다. 살랑이는 기타 선율로 시작하지만, 2014년 말 세상을 떠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배인 듯하다. 조동진은 이 노래가 공개된 그달, 부인 곁으로 떠났다. 장필순이 "돌아가신 형수님이 그리워" 가사를 썼던 '낡은 앞치마'도 앨범에 자리했다.
"아무래도 이런 음악이 리드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살짝 슬픈 기운이 깃들었어요. 하지만 음악을 듣고서 슬프고 서럽기보다 가슴에 담아놓고 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눈물이 가만히 나와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 앨범 시작점은 3년 전이다. 2005년 7월부터 제주에 터를 잡고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며 사는 그가 "채소도 신선한 게 좋듯이 음악도 작업을 바로 끝냈을 때 들려주면 감흥이 다를 것"이란 주위 후배들 이야기를 듣고 디지털 싱글이란 것을 내보려 할 때였다.
마침 장필순 집에 들른 이적이 "누나에게 어울릴 곡이니 꼭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고사리 장마'란 노래를 내밀었다. 이 곡이 '소길 1화'가 됐다.
"이적이 제주에서 느낀 감정을 담은 노래였죠.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고 사람이 변화하는 모습을 그린 것 같았어요. 형님(조동진) 상황이 생길지 몰랐지만, 지나고 다시 들으니 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었죠."
이적에 이어 인근에 사는 이상순·이효리 부부도 곡을 선물했다. 이상순이 작곡하고 이효리가 허밍으로 부른 데모곡이었다. 이 곡이 '소길 3화'로 낸 '집'이다.
장필순은 "리듬 위주의 곡을 부를 땐 몰랐는데 느린 곡을 부르니 효리도 허스키한 음색이더라"며 "제주에 와 자연과 벗하면서 변화된 건지 모르겠다"고 미소 지었다.
여기에 더클래식 박용준의 '아름다운 이름', 동물원 배영길의 '외로워', 이경의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스' 등 동료들이 준 노래가 '소길화' 시리즈를 채워줬다.
각기 다른 이들의 손에서 태어났지만, 장필순과 제주를 떠올리며 만들어진 덕에 곡마다 이질감은 전혀 없다. 마치 제주의 자연과 풍경이 그려지듯 고요한 힐링을 안긴다.
"저를 의식하고 만든 곡이어선지 통일감이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앨범이 제주의 풍경을 보여주듯, 그림이 그려지듯 회화적이길 바랐어요. 여기선 자연과 마주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왔고, 그런 풍경이 눈으로 들어와 제 마음에 담겼거든요."
지금 소길리에는 여름꽃들이 만개했다. 집 앞마당에는 백일홍이 있고, 길가에는 능소화가 많이 피었다고 한다.
그는 "제주에서 13년을 살았는데, 자연과 환경이 주는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며 "그래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피부가 너무 많이 탔다는 것이다. 여기선 몰랐는데 서울에 가면 표시가 난다"고 했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와 소극장 공연 연습을 한다. 앨범 발매를 기념해 오는 18일 부산 오즈홀, 25∼26일 서울 벨로주 홍대, 10월 13일 제주도에서 콘서트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