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광복 73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돌아봐야할 점을 짚어봅니다.
올해는 장로교단이 신사참배 결의한지 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그 당시 한국교호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송주열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130여년 전 기독교선교 초기부터 민족계몽과 독립운동 등을 주도하며 민족과 함께해온 한국교회.
하지만, 일제 강압에 못이긴 한국교회는 193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합니다.
감리교는 이에 앞선 1936년 6월 이미 신사참배를 결의한 상황이었습니다.
주기철, 이기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 수많은 목회자들이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섰지만, 일제의 총칼에 굴복한 총회의 결의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재연] 출처 : 박용규 교수 著, 한국기독교회사 中
일제 심문관 : 그대는 현 일본 국가에 대해서 불평 불만한 점이 무엇인가?
손양원 : 신사참배 강요입니다. '신사'란 황실의 선조인 천조대신을 제사하는 곳인데
나는 일종의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천조대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순교한 이들만 50여 명에 이르고 성결교회는 1943년 일제에 의해 교단이 강제 해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친 이들 대부분은 투옥되거나 침묵, 은둔생활을 통해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 지도부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2년 전투기 헌납까지 결의하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해방을 맞은 뒤에야 신사참배의 과오를 회개하며 그 결의를 취소한다고 선언했습니다.
1954년 4월 장로교 제39회 총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회개하는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형식적인 선언에 그쳤을 뿐 뼈아픈 회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지적입니다.
신사참배에 반대해 옥고를 치른 이른바 '출옥 성도들'과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으면서 장로교단의 분열이 시작됐고, 우리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의 친일청산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편집 김유미
CG 박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