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전북 전주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 등 의료진을 폭행한 10대 환자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사진=전북지방경찰청 제공)
응급실에서 당한 주취 폭력 |
새벽 2시. 오늘은 좀 잠잠하다 싶더니 덩치 큰 20대 남성이 술 냄새가 풀풀 나는 채 실려왔다.
그는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남자 간호사에게 달려들었다.
이내 고함을 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의 뒷쪽으로 움직여 팔과 등을 붙잡고 제지하려던 찰나,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아려왔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거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악몽같은 시간이다. |
지난해 6월, 대구의료원 주취자 응급의료센터에 근무하던 A 경위는 머리를 크게 다쳤다.
술주정을 부리던 환자가 그를 밀쳤고 그는 내동댕이 쳐지며 응급실 벽에 머리를 찧었다.
뇌출혈로 3개월을 입원했던 그는 아직까지도 이따금씩 두통에 시달리고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의사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A 경위는 회복기를 거친 뒤 올해 초부터 이곳에서 다시 근무하고 있다.
당시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겁이 날 때도 있지만 경찰로서 이겨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며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의료진이나 일반 환자가 다치면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항상 먼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1년에 20여명이 환자로 실려왔다가 술김에 말썽을 벌여 형사입건된다고 설명했다.
A 경위와 교대로 근무하고 있는 B 경장은 "가벼운 폭행은 기본이고 욕하고 침뱉고 이런 건 자주 겪는 일"이라고 말했다.
B 경장은 매일 출근하면서 오늘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사진=자료사진)
술에 취해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비단 이 곳뿐만이 아니다.
최근 응급실에서 주취자가 의사를 폭행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 치료차 구미의 한 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던 남성이 술에 취해 의사의 머리를 의료용 철제 트레이로 내려쳐 부상을 입혔다.
응급실 내 폭행은 의료진의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다른 환자의 진료 기회를 방해해 위험에 빠트릴 수 있지만 왕왕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21일 기자가 대구의료원 주취자 응급의료센터에서 밤샘 취재를 했을 당시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없었다.
다만 대부분 고함을 치며 술주정을 늘어놓았고 소리를 듣는 일반 환자들은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당직 의사는 이 병원의 경우 주취자를 위한 별도 공간이 만들어져있어 피해가 덜한 편이라고 했다. 일반 병원은 주취자와 일반 환자 분리가 안 돼 사고 위험이 더욱 크다.
아울러 병원 바깥에서도, 술에 취한 채 범행을 저지르는 '주취범죄'가 늘고 있다.
대구에서 술에 취해 지인을 살해한 일이 이번 달에만 두 차례 발생했다.
지난 5일 알코올중독증을 앓고 있던 50대가 지인 C씨의 집을 여자친구 집이라 착각하고 C씨와 여자친구가 바람이 났다고 오해해 C씨를 살해하는 황당한 범행을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11일에는 20대 남성이 중학교 동창과 술을 마시다 말다툼을 벌여 동창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B 경장은 "이곳에 근무하다면서 그야말로 지금이 알코올리즘의 시대라는 걸, 술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관대한 술 문화가 과도한 음주를 낳고 결국 폭력성까지 끌어내 괴물을 만든다는 얘기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폭력 범죄 피의자 상당수가 술을 마신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자기 감정이나 행동에 대한 통제가 어렵고 죄책감을 덜 느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과거에는 주취 범죄 피의자를 심신미약으로 보고 처벌을 줄이는 온정주의가 있었는데 요즘은 술이 핑계가 되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적당량만 마시는 건전한 음주문화가 확산돼야 하고 그런 문화가 정착되면 범죄 발생률 저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