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상류사회' 연출을 맡은 변혁 감독이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상류사회'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다.
냉소적인 풍자로 가득한 재벌가의 풍경과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이 시대의 자화상처럼 구체적이다. 그러나 곳곳에 심어져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주체성을 내세우지만 남성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주인공 등은 이 영화를 다소 불편하게 만든다.
특히 디지털성범죄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먼저 영상을 전시하는 선택은 실존하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은 영화적 장치로 느껴진다.
젠더 감수성이 영화 콘텐츠에서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고 있는 현 시점에 우리는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상류층을 다루는 흔한 방식을 차용했다고 지루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표현방식의 논란을 지울 수는 없지만 변혁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상류층을 넘어 상류층을 꿈꾸는 이들이 가진 '모순'이 분명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상류층의 민낯을 다룬 영화들과 이 영화가 시작부터 다른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변혁 감독은 '상류사회'를 이 같은 방식으로 연출한 것일까. 이제부터 그에 대한 답을 들을 시간이다. 다음은 변혁 감독과의 일문일답.
▶ 1등을 꿈꾸는 2등에 대한 영화. 사실 소외된 계층의 인물이 성공하거나 이런 서사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이나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올림픽에서도 보면 은메달을 딴 친구가 울고, 오히려 동메달 딴 친구는 웃는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올라갈수록 더 구체적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욕심이 생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더하는 거다. 이런 동력이 서울과 한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 '왜 저렇게까지 하지' 싶을 정도로 열심히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마치 열심히 욕심있게 사는 게 좋다고 장려하다가 기업이 뭔가를 하면 '탐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욕심이 과욕으로 바뀌는 순간이 언제일까, 어디까지는 긍정적인 에너지고 어디서부터는 비난받을 탐욕인가. 그 선과 기준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 질문이 영화의 화두 같다.
▶ 역시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성관계 동영상으로 협박받는 수연이 스스로 그것을 노출시키는 것이 주체적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수연만 전면에 나서는 것이 다소 폭력적이거나 불편한 결말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지금처럼 여성을 향한 디지털성범죄가 화두인 상황에서는.- 영화 초반에 보면 오수연도 함께 장난치다가 찍힌 거라 몰래카메라 식으로 설치해서 찍은 것은 아니라는 걸 짚어주고 있지만 여전히 그런 불편함이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수연이 한 선택은 지호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자신을 압박하는 재벌들마저 초월해버리는 느낌을 준다. 자신을 협박하는 대상이 그들이 아니라 나 스스로인 것 같으니 초월해버리는 거다. 그래서 더 무서운 존재가 되는 그런 장면으로 생각하고 구성했다. 그걸 덮어버리면 사실 삶 자체가 이렇게 씁쓸하다는 현대의 풍광을 잘 묘사한 쿨한 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좀 촌스럽더라도, 절대 다수가 동의하는 선택은 아닐 수 있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내 대신 해주길 바랐다.
영화 '상류사회'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어떻게 보면 경제나 정치할 것 없이 우리 사회 상류층에서 벌어지는 비리들이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는 영화다. 최근 일어난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안희정 도지사 사건이나 한진그룹 갑질이나 요즘에 드러난 것이지 3년 전, 5년 전에는 없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관 비자금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를 봤을 때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지 않나. 모든 작가들이 알 법한 소재들이다. 특히 정치 부분과 관련해서 나는 포털사이트 시작화면이 하나의 텍스트 같다. 정치, 경제, 스포츠, 예술, 맛집 정보까지 굉장히 깊이 있고 강한 뉴스들이 순식간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일반인들도 전문가의 영역을 익숙하게 넘나들기 때문에 이런 플롯 자체를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디테일이 살았으면 했다. 장태준이 이야기하는 시민은행 이야기가 정말 말이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고, 오수연이 이야기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야기도 정말 선수들의 이야기이길 바랐다. 부부 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각자 이야기할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 박해일이 연기한 장태준, 수애가 연기한 오수연 캐릭터도 욕망을 향해 간다는 지점에서는 그 여정이 흥미로웠지만 재벌가들의 캐릭터가 '막장'스럽다고 할 정도의 풍자를 담으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이더라. 그들의 어떤 점을 보고 그런 캐릭터들을 완성했나.- 그들에게 웬만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닌 단계가 오면 중독이 쉽고 계속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누구는 죽게 생겼는데 그들에게는 그것이 한낱 유희거리일 수도 있는 거다. 나 역시 내가 생각나는 지점들, 아는 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런 캐릭터들의 모습을 구축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모습을 단편적으로 그릴 게 아니라 우리 삶도 썩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건 '상류사회'라는 영화가 가진 위험한 점 같기도 하다. 저들은 부당하고 우리는 정의롭다는 구도를 만들기는 쉽지만 우리가 정의로우나 한심한 구석도 있고 저들이 부당하나 괜찮은 구석도 있다는 이야기는 시작부터 불편한 거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인식이다. 그들이 나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우리 또한 그들의 시스템 속에서 타협해 왔다는 거다. 이걸 깨달을 때 이 사회가 진짜 개선의 여지가 있다.
영화 '상류사회' 연출을 맡은 변혁 감독이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 일본 AV 배우의 출연도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영화의 다른 측면보다 여기에 집중하는 시선도 상당하다. 왜 이런 결정을 감행했나.
- 재벌인 한회장에 대한 다양한 그림들이 보였다. 한회장이 예술가라고 자신을 포장하며 갖고 있는 허위적인 모습과 위선을 드러내고 싶었다. 대사로 그걸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 추함을 마주하면서 충격적으로 체감하는 방식을 택했다. 보통 정사신은 어둡고 은밀하게 찍히지만 그 장면은 일반적인 사무실신처럼 밝게 찍히기를 바랐다. 마치 제의처럼 하는 행위인거다. 사실 러닝타임을 별로 길지 않은데 아마 그래서 더 강하게 인식된 것 같다. 한회장 캐릭터의 총체성을 드러내는데 필요해서 넣은 장면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핫한' 작가와 또 한 번 작업을 같이 한 것 뿐이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나미는 그런 자신의 예술적 허영과 포장을 채울 수 있는 인지도 있는 대상이었다. 자기 결핍이 부른 욕망의 오류를 표현하고 싶었다.
▶ 관객으로서 불편한 지점들도 몇군데 있었다. 하나는 수연이 남편 태준과 불륜 관계에 있는 여자 보좌관을 만나 건넨 '너 좋다고 잔다는 남자 있을 때 빨리 결혼하라'는 대사였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 한회장 비서를 향한 정치인의 희롱이었다. 특히 그 부분과 몇몇 장면에서 비서인 여성의 다리를 훑는 카메라 앵글이 불편하게 다가오더라.- 일단 변을 하자면 그 장면은 수연이 잘못 갑질하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신도 갑질에 분개하면서도 자기 위치에서 약자에게 할 수 있는 갑질을 똑같이 하는 거다. 두 번째는 사실 명백하게 변병의 여지가 없다. 대사가 너무 중요해서 넣은 장면인데 성희롱보다는 인격을 무시한다는 느낌으로 썼다. 당연히 남성과 여성의 구도가 있다보니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수연도 똑같이 그런 상황을 당한다. 재벌인 민실장 집에 사과하러 간 수연을 그가 마치 사물처럼 대하는 부분이다. 투명인간처럼 수연을 앞에 두고 옷을 갈아 입은 후, 샤워를 한다. 아무래도 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 연출자 입장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꽤 있었는데 성의껏 답해주셔서 감사하다. 혹시 차기작으로 염두에 둔 작품은 있나. 이번에는 그렇게 오래 쉬지는 않을 것 같은데.- 10여년 전 서래마을에서 일어난 프랑스인 부부 영아 살해 유기 사건을 혹시 기억하나. 그것과 관련된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있다. 한국에는 오래된 이야기라 잊혀졌지만 프랑스에서는 그 이후에도 몇년 동안 재판이 이뤄졌었다. 그 사건 이후의 재판 과정을 프랑스팀과 함께 작업 중이다. 상당히 극단적인 케이스의 사건인데 인간의 죄의식,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들어간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차기작은 아닐 거 같고, 다음에는 조금 착한 영화를 하려고 생각 중이다. 그러면 차기작의 차기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