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3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에 돌입한 지 1달 반 만에 당권주자들이 몸을 푸는 모양새다. ‘김병준 비대위’가 강한 리더십으로 당 장악력을 보이기 보다는 일단 관리형 지도부의 성격을 띄는 데 따른 연쇄작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가장 많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한국당 인사는 지난 6.13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홍준표 전 대표다. 지난 달 11일 미국으로 떠나며 “국내 정치 현안에 대해선 페이스북에 (글을) 쓸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던 홍 전 대표는 최근까지 6개의 글을 올리며 관심을 붙들고 있다.
대표 시절 지방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재신임을 묻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기에 그의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당권도전의 포석으로 해석된다. 오는 15일 귀국 시기에 맞춰 게시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다.
지난 달 31일엔 “경제에 좌파이념을 추가한 정부가 성공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더이상 파국이 오기 전에 새로운 경제정책을 세워야 할 때”라며 야권의 화두인 ‘문재인 정부 경제실정론’의 스피커를 자처했다.
29일엔 “상대방의 프레임에 갇혀 이를 해명하는데 급급해 허우적 대다보면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된다”며 “앞으로 총선 땐 연방제 통일 프레임이 등장할 수도 있다. 우리가 만든 프레임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현 한국당에 던지는 ‘훈수’로도 비춰질 수 있는 대목이다.
당에선 불만 기류가 강하다. 한 관계자는 “훈수를 둘 처지냐”고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 일부 인사들은 비대위에 홍 대표의 당권 재도전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는데, 제명안 발의 요청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실시된 당내 설문조사에서도 선거 참패의 원인으로 홍 전 대표를 지목한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비박계에선 김무성 전 대표의 활동 재개가 눈에 띈다. 김 전 대표는 27일 ‘길 잃은 보수정치, 공화주의에 주목한다’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문재인 정부는 공화주의 정신을 망각한 채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 경직된 근로시간 단축, 탈원전 등 논란이 많은 정책을 독단적으로 강행했다”며 “공화주의는 이런 국정 독주를 막고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잘 반영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세미나 직후 기자들과 만나선 “저부터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고, 당협위원장도 사퇴했다. 책임지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면서도 “국민들에게 우리 당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제가 할 역할이 있으면 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고도 했다.
바른미래당의 유승민 전 대표도 강조했던 ‘공화주의’를 앞세워 보수통합론에 군불을 지피면서 당권도전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김 전 대표 측은 확대해석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오는 4일에도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기조를 겨냥한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원내사령탑으로서 대여(對與) 투쟁의 선봉에 선 김성태 원내대표와, 구(舊) 바른정당에서 원내대표를 역임한 주호영 의원도 비박계 복당파 가운데 잠재적 주자로 거론된다. 나경원 의원도 전대 출마를 준비 중이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외부에 있지만 당내에서 이름이 오르내린다.
뚜렷한 주자가 보이지 않는 친박계에선 황교안 전 국무총리의 공개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잠행했던 황 전 총리는 7일 ‘황교안의 답, 청년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수필집 출판기념회를 연다. 그는 최근 들어 정치권 인사들과도 활발히 접촉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행사가 정계 복귀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김경수 경남지사에게 한 자릿수 득표율 차이로 석패한 김태호 전 경남지사도 친박계 후보군으로 분류된다. 김 전 지사 역시 최근 김기현 전 울산시장, 서병수 전 부산시장 등 전직 한국당 광역단체장들과 만나는 등 당 안팎 접촉면을 넓히고 있다. 정우택·유기준·심재철 의원도 잠정적 주자다.
이들 후보군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배경으론 김병준 비대위의 ‘약한 리더십’이 거론된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계파 간 갈등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인적쇄신 등 고강도 혁신은 후순위로 미뤄두고, ‘신(新) 보수 가치정립’이 우선이라며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초반엔 ‘국가주의’라는 표현으로 현 정부의 정책기조를 비판하며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지지율 정체현상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면서 손에 잡히는 혁신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는 당내외 압박에 직면했다는 평가다. 한 중진 의원은 “비대위의 역할은 체제 안정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본다. 본격적 개혁은 내년 초 나올 새 지도부가 주도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를 의식한 듯 김 위원장은 지난 달 30일 “많은 분이 당의 개혁 방안들이 바로바로 안 나오냐고 하는데 조급증을 낼 일이 아니다”라면서 “우리는 지금 큰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대위는 이달 중에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기조와 경쟁할 새로운 성장 모델을 공개하겠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