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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금정굴 희생자에게 "토착 빨갱이"

사회 일반

    '민간인 학살' 금정굴 희생자에게 "토착 빨갱이"

    과거사 정리위원회, 불법 희생 사건 규정했지만...
    보훈단체 "태극단과 경찰 등은 학살자로 매도됐다"

    고양현충공원. (사진=고무성 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에 위치한 현충공원.

    '제68주년 태극단 순국열사 합동 추모식' 후 식사를 마치고 남은 유가족과 보훈단체 회원 60여 명이 54위의 묘를 뒤로한 채 현충공원 정문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양시 지원 조례에는 태극단에 대해 6·25전쟁 당시 고양과 파주지역이 북한 치하에 있을 때 경의선 열차를 이용하는 통학생을 주축으로 조직된 애국청년지하결사대로 정의하고 있다.

    (사진=고무성 기자)

     

    유가족과 보훈단체 회원들은 곧이어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고양시의회는 고양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폐지하라"면서 "태극단 희생자와 금정굴 희생자 모두를 한 곳에 모셔 이 땅에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기 위한 교훈으로 남길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성명서를 대표로 낭독한 한 보훈단체 지회장은 보수 언론과의 인터뷰에 들어가자 돌변했다.

    지회장은 "토착 빨갱이들이 희생자가 됐다"며 "6·25전쟁에 참여했던 태극단원들이나 군인, 경찰관, 모든 사람이 학살자로 매도됐다"고 주장했다.

    도로를 향해 내걸려 있어 읽기 어려웠던 현수막들도 자세히 보니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무고한 양민으로 위장된 금정굴 희생자에 관한 지원 조례를 철회하라, 고양시는 금정굴 희생과 유해 안치료로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지 마라' 등이 적혀 있었던 것.

    ◇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이란?

    이 사건은 지난 1950년 서울 수복 후 부역 혐의자 또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최소 153명의 민간인이 경찰과 치안대, 태극단 등에 의해 일산서구 탄현동 금정굴에서 집단 희생당했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국가 권력에 의해 주민들이 불법적으로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정부와 지자체에 위령 사업을 권고했다.

    1995년 발굴된 유골들. (사진=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그러나 1995년에 발견된 이들의 유골은 23년째 병원 창고와 봉안당을 떠돌고 있다.

    '고양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이 보수단체와 정당의 반대로 6차례나 부결됐기 때문이다. 해당 조례는 처음 발의된 지 8년 만인 올해 8월 31일 드디어 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 금정굴 유족, 오히려 "이제는 서로 화해하자"

    지난해 10월 열린 제67주기 25회 고양위령제에 참석한 채봉화(72.여) 씨. (사진=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회장이자 유가족인 채봉화(72.여) 씨는 당시 조례가 통과되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펑펑 울었다.

    채 씨는 아버지의 기억이 없다. 네 살 때 돌아가셔서 당시 상황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평생 원통해 하며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당시 35살인 채 씨의 아버지는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두 명의 치안대에게 끌려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미리 소식을 들었지만, 부역을 하지 않아 당당했기 때문에 도망도 안 갔었다고 한다.

    채 씨는 "아버지는 무슨 죄로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른 채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며 "자식들과 노모를 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억울했겠냐"고 눈물을 흘렸다.

    채 씨의 가족은 뒤늦게 개인적인 원한을 갖었던 이들의 한 조카로부터 아버지가 모함을 당해 금정굴에서 살해당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함한 세 사람이 누군지도 다 알게 됐다.

    이에 당시 경찰이었던 외삼촌은 총을 들고 와서 복수하려 했다. 하지만 채 씨의 할머니는 "원수는 원수를 낳게 된다. 그 사람들을 죽이면 우리를 다시 원수로 생각하지 않겠냐"며 말렸다.

    채 씨의 어머니는 9년 뒤 38살의 젊은 나이에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다.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두고 봐라"는 것. 어머니의 말대로 그 세 사람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최 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은 뒤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여의도를 비롯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금정굴 사건의 유족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몇 명 남지 않았다.

    채 씨는 마지막으로 조례가 통과되면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조례를 막아왔던 보훈단체가 다시 집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절망했다.

    채 씨는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와서 눈물 밖에 나오지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제는 서로 화해하고 관용으로 베풀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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