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텍사스 고모' 작가 윤미현(좌)과 연출 최용훈. (사진=국립극단 제공)
36년 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주한미군과 결혼하여 텍사스로 떠났던 고모. 수영장이 딸린 이층집에서 우아한 일상을,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지금처럼 굶주리지는 않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모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오빠에게 돌아온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환갑이 넘은 오빠가 19살의 키르기스스탄 여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시대와 국적이 각각 다른 두 결혼 이주 여성의 다르지만 같은 삶을 소재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연극 '텍사스 고모'가 무대에 오른다.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윤미현 작가는 "대학 때 만난 친구 고모의 이야기가 모티브였다"며 "지금 우리 시대의 이주민을 보며 느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고 소개했다.
2015년 여성가족부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혼인 귀화자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4배 많았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우리 사회의 충분한 준비 없이 진행된 국제결혼은 다양한 문제를 낳았다.
특히 이주 여성들에게 지나친 노동을 강요하거나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식의 문제는 뚜렷한 해결방안 없이 반복되고 있다.
'텍사스 고모'는 더 나은 환경을 꿈꾸며 다른 나라로 이주했으나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당한 여성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인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겪는 아픔을 세밀하게 그린다.
작품은 이주 여성들의 호소를 외면하며 철없는 행동을 일삼는 어른들, 그에 반해 윗세대의 씁쓸한 풍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대비시켜 아이러니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번 공연은 다문화 사회의 숨은 문제를 포착해내면서 이주민에 대한 차별, 난민 문제 등 우리가 이 시대에 새롭게 마주한 과제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최용훈 연출은 "이주 여성이라는 소재 때문에 무거운 작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편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할 것 이 작품을 통해 느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특히 "극에 '너네는 이런 거 없지'라는 대사가 있는데 많이 와 닿는 말이다"며, "지금의 이주민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것은, 과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간 우리 윗세대가 겪은 아픔에 대해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복하는 잘못은 아닌지 되돌아보자"고 강조했다.
연극 '텍사스 고모'에 출연하는 배우 윤안나(좌)와 박혜진. (사진=국립극단 제공)
극의 전반을 이끄는 두 여성 캐릭터는 풍부한 연기 내공을 지닌 배우 박혜진과 독일 출신의 배우 윤안나가 연기한다.
박혜진은 "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특히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사람과 인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극 중 '인간이 인간에게 그러면 안 되잖아'같은 대사는 정곡을 찌르는 작가만의 언어이다"고 평했다.
윤안나는 "외국에서 온 내가 이 역할을 맡아 감사하다"며 "상황이 같지는 않지만, 다른 나라 여성으로서 한국에 사는 것에 대한 공감을 많이 얻었다"고 전했다.
(사진=국립극단 제공)
이번 작품은 국립극단과 안산문화재단의 공동제작 작품이다.
국립극단 오현실 사무국장은 "그동안 국립극단은 자체 제작이나 기획초청 공연은 해왔지만 협업은 처음이다"며 "그동안 서울과 지역의 문화 격차가 심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해소법이 무엇일까 꼬민을 하다 적극적으로 협업을 해보자는 의견이 모여 시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안산문화재단 백정희 대표이사는 "공모를 통해 얻은 이 대본을 국립극단에 넘기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화도 났다. 이 좋은 작품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이었다"고 했다. '텍사스 고모'는 2017년 제4회 ASAC창작희곡공모의 대상 수상작이다.
백 대표이사는 "하지만 안산에서 만들었다면 '너희들에 대한 이야기를 너희가 하는구나' 정도로 끝났을 것 같다"면서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국립극단 함께 하는 것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전 국민이 같이 공유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고 전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별무리극장에서 10월 26일부터 10월 27일까지 공연되며, 11월 2일부터 11월 25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된다. 전 석 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