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김지영 수석무용수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연습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국립발레단의 간판 김지영 발레리나는 1978년생, 41살이다. 마흔을 넘기고도 현역으로 시즌을 뛰는 발레리나는 역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하지만 김지영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듯 하다. 발레리나로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전히 파워풀한 동작과 섬세한 감정연기를 펼치며 절정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번에는 실존 인물을 다룬 작품 '마타하리'의 주인공으로 변모한다.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그를 지난 19일 서초구 국립발레단에서 만났다.
◇ 마타하리 역 맡은 김지영 "미스테리한 여자의 일생, 춤추며 이해하게 됐어요"
그녀는 요즘 마타하리의 인생에 푹 빠져있었다. 지젤, 줄리엣, 오데뜨 공주 등 동화속 캐릭터가 아니라 유럽을 사로잡은 팜므파탈인 역사적 인물 마타하리를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타하리라는 여성은 정말 미스테리한 여자에요. 굉장히 매력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지만 그시대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어요. 보통은 연약하고 착한 여주인공 캐틱터가 대부분이고 저도 그게 익숙해졌는데 이번 작품은 전혀 달라요. 마타하리가 위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인도 아니잖아요. 마타하리의 복잡한 감정을 몸 전체로 표현을 해야하기 때문에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국립발레단 김지영 수석무용수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연습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국립발레단 김지영 수석무용수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연습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마타하리는 국내 초연 작품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안무가 레나토 자넬라가 국립발레단을 위해 새롭게 각색했다. 최근 발견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마타하리의 인생을 재조명하고 이중스파이보다는 자유를 갈망한 여성으로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캐릭터에 대해 설명하는 열정적인 눈빛을 보며 장면 장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마타하리가 파티에서 장교와 대화를 나눴는데 부인이 불륜으로 의심을 하고 자살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보통은 그 상황에서 슬퍼하고 죄책감을 느낄텐데 마타하리는 오히려 '내가 저 여자처럼 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결혼 생활을 두려워해요. 그 반응을 어떤 동작으로 표현하는게 아니라 제 몸 전체, 영혼으로 표현하는건 제 몫이죠. 솔직히 그녀가 제 타입의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후배 김기민 무대 보고 가슴이 벅차 올라 울었어요"그는 후배들이 부러워하는 꽉찬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96년 국립발레단에 당대 최연소로 입단했다가 해외로 건너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7년간 활동하며 수석무용수 자리까지 올랐다. 200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0년간 무대에 오르며 국립발레단과 성장의 시간을 함께 했다. 스스로 발레리나로서 역사를 써왔고 긴 세월동안 한국 발레를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90년대만 해도 해외에 나가면 "한국에도 발레가 있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그녀는 최근 한국 발레의 눈부신 성장을 체감하며 후배들의 성공을 기뻐했다. 인터뷰 도중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는 김기민 얘기가 나올 때는 벅찬 마음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기민이의 지젤 공연을 못봐서 몇달 전에 일본으로 직접 보러 갔었어요. 기민이가 그렇게 큰 무대에서 전세계인들 앞에서 훌륭한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차서 커튼콜에서 펑펑 울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봤던 친구인데 그 친구를 가르친 선생님, 한국 발레를 위해 노력하는 여러 사람들이 순간 다 떠오르더라구요. 그런 모든 노력들이 쌓여서 기민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거든요"
국립발레단 김지영 수석무용수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연습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기 전 토슈즈를 신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 "고통을 달고 살아요, 그래도 발레를 하는 이유는…"무대에서는 완벽하지만 수십년간 춤을 춘 발레리나에게 통증과 부상은 피하기 힘들다. 김지영은 아킬레스건과 허리에 "통증을 달고 산다"고 했다.
"일 년 중에 안 아픈 날이 한 30일 밖에 안되는 것 같애요. 작년, 재작년에는 아킬레스건 때문에 은퇴를 해야하나 고민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어요. 아프면 당연히 하던 동작도 안되고 심리적으로도 정말 힘들어요. 그래도 하나 긍정적인 건 아프면서 제 몸에 대해서 많이 배운다는 거에요. 동작도 더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몸 관리를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요"발레를 쉴 때에는 필라테스, 웨이트 등 다른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든다는 김지영은 수술을 하라는 의사들의 권유도 뿌리치고 고통을 참은 채 오직 무대를 위해 자신의 몸을 소중히 다루며 춤을 추고 있었다.
"20대 때는 무대가 무섭지 않았어요. 자신만만했고 거침이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무대가 두려워요. 저 하나 실수한다고 그렇게 큰 일이 나는 건 아닌데 항상 두려워요. 어떨 때는 무대 오르기 전에 기절할 것처럼 압박감이 오기도 해요"때론 '두려움', '불안감'이 마흔의 발레리나를 엄습해오지만 그래서 20대 때는 알기 힘든 인생의 감정이 더 풍부하게 무대에서 표현되는지도 모른다.
국립발레단 김지영 수석무용수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연습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이다. 김지영은 은퇴하는 그날을 계속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다고 했다.
"몇년 전부터는 항상 그 생각을 머릿속에 해요. 제 마음적으로 (은퇴를) 오래오래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의 마지막 무대, 마지막 공연은 어떨까. 슬플까, 아님 후련할까 계속 상상해보는 거에요. 젊을 때는 '뭐 나는 오래 춤 안출거야'라고 쉽게 얘기하기도 했는데,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쉽게 놓아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선배 무용수들이 더 생각나기도 하고요"마지막으로 김지영에게 발레란 뭘까라고 물으니 "엄마같은 존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태어나서는 엄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인생의 전부였다가 사춘기가 되면 반항도 하고 벗어나고 싶죠.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엄마를 더 이해하고 더 사랑하게 돼요. 발레도 저에게는 엄마같은 존재에요"십수 년간 탑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은 그녀의 비결은 그저 하루하루의 노력이었다.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불안감을 떨쳐가며 무대에 오르는 그녀는 발레를 통해 인생을 더 깊이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