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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추상미 “한국전쟁의 상처를 새롭게 조명하고 싶었어요”

문화 일반

    [인터뷰] 추상미 “한국전쟁의 상처를 새롭게 조명하고 싶었어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
    1951년 폴란드로 간 1500명의 한국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
    교사들, 67년 지났지만 아이들 이름과 한국말 기억해
    참혹한 2차대전의 기억을 사랑으로 치유한 교사들
    탈북 연기자 ‘이송’ 제작과정에서 트라우마 극복해
    같은 주제의 극영화도 제작 예정, 다큐 10/31 개봉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19:55)
    ■ 방송일 : 2018년 10월 26일 (금)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추상미 감독

    ◇ 정관용>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그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신화.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떠나는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서 매회 매진을 기록하며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소개글입니다. 작품성도 매우 훌륭하지만 바로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반가운 분이라서 더 화제를 모았죠. 바로 배우 추상미 씨인데요. 지금 제 옆에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 추상미> 안녕하세요.

    ◇ 정관용> 감독 추상미. 그렇죠?

    ◆ 추상미> 네.

    ◇ 정관용> 이번에 처음 영화인가요?

    ◆ 추상미> 아니요. 단편을 두 작품 연출해서 국제영화제도 갔었고요. 이번에 장편으로서는 처음입니다.

     


    ◇ 정관용> 장편으로는 처음. 그런데 극영화는 아니고 다큐멘터리네요?

    ◆ 추상미> 원래 극 영화를 준비했었죠.

    ◇ 정관용> 이 소재로?

    ◆ 추상미> 네. 그런데 다큐로 먼저 사전 다큐멘터리를 먼저 만들게 됐어요.

    ◇ 정관용> 우선 1951년에 1500명 고아가 폴란드에 갔어요?

    ◆ 추상미> 네.

    ◇ 정관용> 왜요?

    ◆ 추상미> 당시에 1951년이 한국전쟁 정점기였거든요. 그때 이제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북한군이 서울 이남지역까지 밀고 내려왔죠. 당시에 발에 밟힐 듯이 많은 전쟁고아들이 있어서 정말 더 이상 전쟁을 못할 만큼 아이들을 슈용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당시에 사회주의 동맹국들의 허락을 받아서 김일성이 이 아이들을 모두 러시아 쪽으로 보내서 동유럽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합니다.

    ◇ 정관용> 폴란드가 사회주의니까.

    ◆ 추상미> 네. 당시 러시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동독, 폴란드 등지에 사회주의 동맹국가들로 보내게 되죠.

    ◇ 정관용> 모두 몇 명이나 갑니까?

    ◆ 추상미> 정확한 수는 조금씩 논문마다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폴란드로만 1500명이 갔고 다른 나라까지 합치면 수천 명의 고아들이 갔죠.

    ◇ 정관용> 몇 살짜리 정도가 간 거예요?

    ◆ 추상미> 한 4살에서 12살 정도에 갔어요. 그 사이에 있는 아이들이.

    ◇ 정관용> 그런 일이 있었군요.

    ◆ 추상미> 네, 이게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요. 십 몇 년 전에 루마니아로 간 케이스가 공중파에서 방송된 적이 있어요, 다큐로.

    ◇ 정관용> 그래요?

    ◆ 추상미> 그런데 그건 아이들의 초점이 안 맞춰졌고 그때 북한 인솔교사들이 따라갔는데 루마니아 현지 여교사와 북한 인솔교사의 사랑을 다룬 다큐영화였어요.

    ◇ 정관용> 그것도 독특한 작품이네요.

    ◆ 추상미> 그래서 그때 그 작품이 아이들이 중심이면 그게 좀 화제가 됐을 텐데. 그리고 당시에는 시국 자체가 북한전쟁 고아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그냥 유추해 볼 때에는. 그래서 그게 그냥 소리소문 없이 묻혔어요, 그 얘기가. 그때 한 번 딱 조명된 적이 있었죠.

    ◇ 정관용> 그런데 아까 추상미 감독께서 한국전쟁 정점기이고 북한 군이 서울 밑에까지 내려와 있던 상태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방금 북한 전쟁고아라고 그러셨는데 북한, 남한 그게 구별될 수 있나요?

    ◆ 추상미> 사실은 저는 서울에서 리서치할 때는 북한 전쟁고아만 해당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폴란드에 가서 이거를 2006년도에 실화소설과 다큐멘터리 폴란드 국영TV 기자가 그것을 다큐멘터리와 소설로 만들었는데.

    ◇ 정관용> 폴란드 내에서는 그렇게 조명이 됐군요.

    ◆ 추상미> 아마 그분이 이것을 파헤친 분이라. 그런데 그분께 들은 얘기가 남한 전쟁고아도 섞여 있었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저도 충격을 받았죠.

    ◇ 정관용> 저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전쟁 와중에 전쟁에 장애가 될 정도까지 고아가 넘쳐났다 말씀하셨잖아요.

    ◆ 추상미> 그런데 남한, 북한 구분도 안 되어 있을 테고.

    ◇ 정관용> 그러니까요. 전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긴 전쟁고아들부터 다 보낼 수 있지 않았겠어요.

    ◆ 추상미> 그렇죠.

    ◇ 정관용> 그렇게 1500명이나 폴란드로 가서 그분들 지금도 폴란드에 삽니까?

    ◆ 추상미> 그분들은 8년 동안 폴란드에서 폴란드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서 전쟁 트라우마가 많이 회복되고 전원 북한으로 북송이 됩니다, 남한 고아까지.

    ◇ 정관용> 북한으로 갔어요?

    ◆ 추상미> 네, 남한 고아들까지.

    ◇ 정관용> 왜요?

    ◆ 추상미> 당시에 한 두 가지 정도 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 다큐멘터리에서는 가장 큰 원인으로 천리마운동. 당시에 북한이 1958년도에 전 인민을 노동에 동원을 하는 동원령이 내려졌고 이 아이들이 이제 사춘기를 넘어서서 17~18살 이 나이가 되니까 이 아이들.

    ◇ 정관용> 노동력인 거죠.

    ◆ 추상미> 노동력인 거죠. 이 아이들을 다 보냈고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동유럽에 해빙모드가 조성이 됐어요. 그러면서 폴란드에서도 비에루트라는 사회주의 독재자가 죽으면서 약간 자유노조의 그 기미가 막 보이기 시작하는 그때여서 그런 원인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추상미 감독 (사진=시사자키 제작팀)

     


    ◇ 정관용> 그런데 51년이면 벌써 지금 몇 년 지난 겁니까?

    ◆ 추상미> 65년.

    ◇ 정관용> 65년? 67년 그렇죠.

    ◆ 추상미> 67년이네요.

    ◇ 정관용> 그때를 기록한 뭐가 있기는 있어요? 다큐멘터리라면 뭔가 장면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 추상미> 아마 그 장면이 없었으면 이게 다큐멘터리가 형식이 안 됐겠죠. 인터뷰만 가지고 가야 하는데.

    ◇ 정관용> 장면이 있어요?

    ◆ 추상미> 자료가 너무 부족하고. 폴란드 국립영상자료원에 너무나 기가 막힌 당시의 아주 깨끗한 장면들이 있는데 더 퀄리티가 높은 것은 우리나라로 치면 그냥 대한뉴스 상상해 보시면 되잖아요, 옛날의 그런 자료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예술 장르가 유행을 했거든요. 아티스트들이 그 체제의 그것을 다 활용을 했는데 굉장히 예술적인 것으로 찍으셨어요. 그래서 사진작가가 찍은 북한 고아 영상이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 정관용> 그 영상 분량이 꽤 됩니까?

    ◆ 추상미> 저희 영화에서는 한 4분 정도니까 꽤 된다고 봐야죠, 분량이.

    ◇ 정관용> 그리고.

    ◆ 추상미> 전체는 많죠. 전체는 굉장히 많죠.

    ◇ 정관용> 많아요? 그 당시 기록이?

    ◆ 추상미> 그 자료가 엄청나게 비쌌어요. 작가의 아티스트 저작권에 해당해서. 그냥 국가 대 국가로 그런 어떤 뉴스 보도자료 같은 거면 좀 저렴했을 텐데. 굉장히 비싼 값에 구입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4살부터 한 12살 사이의 한국 고아들 폴란드말은 한마디도 모를 것이고.

    ◆ 추상미> 둘 사이에 사전도 없었죠.

    ◇ 정관용> 처음 만나서 어떻게 해요?

    ◆ 추상미> 선생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말 바디랭귀지부터. 이렇게 물건 사과를 보여주면서 폴란드말로 사과, 사과, 사과. 설명해 주면서 이건 사과야 그런 식으로 읽힌 거죠.

    ◇ 정관용> 폴란드 그 당시에 돌보던 선생님들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 추상미> 원래 300여 명의 교사가 있었는데요.

    ◇ 정관용> 300명이나?

    ◆ 추상미> 네. 왜냐하면 아이들이 1500명이었기 때문에.

    ◇ 정관용> 그래도요. 300명이면 5:1 아닙니까. 상당히 많이 배치가 된 셈이네요.

    ◆ 추상미> 그런데 지금 현재 생존해 계신 분들은 10여 분 생존해 계세요.

    ◇ 정관용> 만나뵈셨어요?

    ◆ 추상미> 다 만나지는 못했고요. 제가 가장 다큐 촬영 중에 그 부분이 안타까운데. 원장님. 다행히 굉장히 럭키하게 원장님은 살아계셨고 남자 선생님들은 많이 만났는데 여자분들이 원래 두 분이 인터뷰에 응해 주고 하셨는데 한 분은 저희가 가기 전에 큰 사고를 당해서 안면 수술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돼서 못 만났고요. 그 선생님이 가장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리고 또 한 분은 2000년대 초반에 본인이 가르쳤던 북한 고아들을 만나러 가신 분이 있어요. 사진은 제가 봤거든요.

    ◇ 정관용> 북한으로?

    ◆ 추상미> 네. 북한 정부의 초청을 받아서 감사패를 받기 위해서 가셨는데 그분은 북한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출연할 수 없다고 거절을 하셨죠.

    ◇ 정관용> 그래도 아무튼 몇 분은 만나뵈셨을 거고 60여 년 전 일인데 다 생생히 기억하시던가요?

    ◆ 추상미>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고 사진을 보관하고 계시고 아이들 이름도 기억하고 계시고 한국말도 기억하고 계시고. 그래서 이분들은 폴란드 민족적인 DNA인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지? 노인분들인데 너무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데 거기에는 이제 어떤 사연이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됐죠.

    ◇ 정관용> 어떤 사연이요?

    ◆ 추상미> 그러니까 이것을 파헤친 이유, 다큐멘터리의 주제하고도 관련이 있는 부분인데 이분들이 아이들을 회상하면서 65년이 지났는데도 다 같이 눈물을 흘리시고 너무 잘 기억하고 계시고 한 아이, 한 아이 특징. 물론 모든 아이를 기억하시지는 않지만 본인하고 친밀했던 아이들에 대해서 다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 정관용> 눈물까지 흘리고?

    ◆ 추상미> 눈물을 흘리고.

    ◇ 정관용>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

    ◆ 추상미> 네. 그러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부모가 그냥 어떤 이유에 의해서 생이별한 자식을 그리워하는 느낌이라고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 감정으로.

    ◇ 정관용> 그 정도로.

    ◆ 추상미> 그리워하시고. 그래서 물론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됐고 그 아이들이 간 뒤에 그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 것들을 모르시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그랬지만 이제 제가 더 깊이 들어가서 리서치를 해 본 결과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오기 한 7년 전 정도에 2차대전이 끝났거든요, 폴란드에서. 그래서 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은 좀 비교가 불가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팩트상으로는 폴란드가 겪었던 전쟁의 참상이 훨씬 더 커요.

    ◇ 정관용> 자기들도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

    ◆ 추상미> 그렇죠. 그리고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본인이 고아인 분들이 등용이 많이 됐어요.

    ◇ 정관용> 동병상련이군요.

     


    ◆ 추상미>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원장님이 북한 아이들이 한국 전쟁 고아들이 기차역에서 내렸을 때 까만 머리, 까만 눈에 생전 처음 보는 동양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머나만 타국의 아이가 아니라 내 유년 시절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일부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커리큘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을 했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도록 지시했습니다라는 말을 하세요. 그래서 그냥 선행을 하신 게 아니라 거기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발견하셨던 거고 회복하셨던 거죠, 아이들을 사랑함으로써.

    ◇ 정관용> 진짜로 엄마, 아빠라고 불렀대요?

    ◆ 추상미> 네. 마마, 파파라고 불렀어요.

    ◇ 정관용> 그리고 8년 만에 완전히 진짜 강제 이별당한 거잖아요.

    ◆ 추상미> 8년을 같이 지냈는데 한 일주일 전, 작별하기 일주일 전에 통보가 내려졌죠. 전원 북송하라고. 그러니까 아이들도 굉장히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 이전에 먼저 북송된 아이들이 있었어요. 약간 학습 부진아들. 먼저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편지가 좀 문제가 됐죠. 노동을 아이들이 하고 폴란드에서 천국같이 보내다가 힘든 것들을 경험하니까. 아이들이 갑자기 두려워진 거죠.

    ◇ 정관용> 가기 싫어했겠네요.

    ◆ 추상미> 네. 그래서 안 가겠다고 눈밭에 뒹굴어서 감기 걸려서 몸을 아프게 해서 안 가려고 하는 꾀병 피우고.

    ◇ 정관용> 일부러 눈밭에서 뒹굴어서?

    ◆ 추상미> 안 가려고.

    ◇ 정관용> 아이고, 얼마나 절절해요.

    ◆ 추상미> 그러니까요. 선생님들이 그거 기억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그러시더라고요.

    ◇ 정관용> 선생님들도 보내기 싫었을 거 아니에요.

    ◆ 추상미> 마지막에는 친밀했던 아이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중에서. 그런 아이들은 좀 입양하고 싶다고 한 10여 명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선생님 몇 분이 북한대사관에 요청했는데 아마 북한 입장에서는.

    ◇ 정관용> 거절했겠죠.

    ◆ 추상미> 거절했겠죠.

    ◇ 정관용> 이번에 가서 만나본 선생님들은 그 후에 그 아이들을 한 번도 못 봤을 거 아닙니까? 그렇죠? 다들 그리워하죠, 지금도?

    ◆ 추상미> 그런데 편지를 2년 동안 보내왔어요, 아이들이.

    ◇ 정관용> 돌아간 후에 2년 동안?

    ◆ 추상미> 돌아간 후에. 그런데 그 편지 내용은 물론 공부 잘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적응한 아이의 그룹이 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 돌아가고 싶다. 저를 여기에서 좀 빼내달라 막 그런 아이들도 있었고. 그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죠, 선생님들을.

    ◇ 정관용> 그나저나 그렇게 돌아가서 북한에서 그들은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다큐에 그걸 담을 수도 없을 거 아니겠어요.

    ◆ 추상미>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있었는데 다큐에 담기는 좀 불충분했고요. 그중에 많은 분들이 엘리트층을 형성한 게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북한에 돌아가서 이 아이들이 폴란드어를 잘하고 러시아말을 잘했기 때문에.

    ◇ 정관용> 그렇죠, 그렇죠.

    ◆ 추상미> 어학 쪽으로 고등학교 언문학 선생님 그리고 대학교수. 그래서 40년 후에 대사가 되어서 북한에 돌아온 사람이 있었고. 영사가 되어서 돌아온 사람. 교환 교수로 온 사람. 이렇게 세 분.

    ◇ 정관용> 교환교수나 북한으로 온 게 아니라 폴란드로. 그래서 그분들이 임기를 마치고 다시 북한에 돌아간 기록은 있어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이 영화 소개에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떠나는 일화가 나오거든요. 남에서 떠난 여자는 추상미 감독일 거고 북의 여자는 누구예요?

    ◆ 추상미> 북의 여자는 이송 씨라고요. 배우 지망생이고 지금 연기를 공부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아가씨인데요. 이 친구를 제가 처음에 극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런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이거가 어차피 아이들, 청소년 배우가 주인공인데 남한 아이들만 다 뽑지 말고 투자를 위해서라도 주연급들은 남한을 뽑아야겠지만 조단역들은 정말 그 외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어요. 이게 시대극이고 1951년이고 전쟁 고아고. 어떤 느낌 자체가 좀 굉장히 북한 아이들처럼 생겼으면 좋겠고.

    ◇ 정관용> 탈북소녀 이런.

    ◆ 추상미> 그런 채취도 느꼈으면 좋겠고 특히 아이들이 이제 민속적인 춤이나 가락들은 북한 아이들은 굉장히 탈북 아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알고 있거든요. 몸에 익히고 있는데. 그런 부분도 또 그런 말하자면 장기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오디션을 거쳐서 4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배우를 뽑았어요. 뽑힌 아이 중에 가장 큰 조역으로 뽑힌 아이가 우리 이송 씨예요.

    ◇ 정관용> 탈북 처녀?

    ◆ 추상미> 네, 탈북 처녀 이송 씨.

    ◇ 정관용> 그런데 왜 같이 갔어요, 폴란드에.

    ◆ 추상미> 제가 이걸 다큐로 빨리 돌리게 되면서 제가 프리젠터를 하자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새롭게 다큐를 기획할 시간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차피 원래 목적이 시나리오의 완성을 위해서 가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 자체를 그냥 노출하는 다큐를 만들자. 한 감독이 극영화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리서치. 그러면서 이제 이 이송이라는 친구에게 연기도 가르쳐주고 역할에 대해서 설명도 해 주고. 그리고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어떤 귀덕이라는 역할이 있는데 그 아이가 거기에서 희귀병으로 죽어요 폴란드에서 실제로.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역할이기 때문에 그런 그림들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간 거죠.

    ◇ 정관용> 연기의 배경을 보자, 같이. 이렇게 된 거네요.

    ◆ 추상미> 그리고 저 혼자 보는 것보다 북한에서 온 아이가 있을 경우에 더 좋겠다 싶었는데 전혀 상관없는, 예상치 못한 송이만의 스토리가 생겨버린 거죠.

    추상미 감독 (사진=시사자키 제작팀)

     


    ◇ 정관용> 뭐요, 어떤 스토리?

    ◆ 추상미> 이제 저는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송이라는 친구가 탈북 과정에서 상처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 정관용> 다 상처가 크죠.

    ◆ 추상미> 그래서 저는 그 과정의 어떤 경험들, 트라우마들을 이렇게 좀 기록하고 싶었어요. 시나리오에 도움을 받고 그래서. 그런데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 정관용> 입을 닫아버려요?

    ◆ 추상미> 그래서 굉장히 처음에 속을 많이 끓였어요. 그랬는데 폴란드 선생님을 만나면서 이 친구가 마음의 빗장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 정관용> 말을 해요?

    ◆ 추상미> 네. 65년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 생각이 나시잖아요, 선생님들이. 그러니까 막 물어보시는 거예요. 어떻게 넘어왔냐 지금 북한은 어떠니 막 이런 질문하시면서 안아주시고 눈물 흘려주시고 하니까 치유되고 막 울더라고요. 울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부터.

    ◇ 정관용> 이송의 또 치유.

    ◆ 추상미> 치유 스토리가 영화에 들어가게 됐죠.

    ◇ 정관용> 그렇군요.

    ◆ 추상미> 그 얘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선생님들이 이제 가르쳤던 북한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똑똑했는지 이런 얘기를 하니까.

    ◇ 정관용> 알겠습니다. 우선 소재부터 아주 정말 드라마틱하고 어쨌든 추상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뭘 말하고 싶은지, 마지막으로.

    ◆ 추상미>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상처를 새롭게 좀 재조명해 보고 싶었고요.

    ◇ 정관용> 상처.

    ◆ 추상미> 선생님들의 상처가 개인의 상처이자 역사의 상처인 그 전쟁의 경험이 다른 민족을 품는 데 굉장히 선하게 사용이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저희 한국전이나 분단의 상처들이 어떻게 성찰이 되어 왔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 아픔을 좀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게 그냥 버려지고 폐기처분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틀 수 있고 아름다운 스토리들이 새롭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그래서 그런 상처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 정관용> 전쟁의 아픔 그 상처. 그러나 그 안에도 사랑이 흐르고 있었고 또 그 안에 서로 치유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 추상미> 상처가 아니면 드러날 수 없는 사랑이었죠.

    ◇ 정관용> 다음 주 수요일 개봉이죠?

    ◆ 추상미> 네, 맞습니다.

    ◇ 정관용> 보통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관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몇 십군 데 잡혔습니까, 지금?

    ◆ 추상미> 잡히기는 잡혔는데요. 아직은 많이 열리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좀 많은 분들이 더 관심을 가져주시면 극장도 문을 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이런 영화를 좀 많이 상영해야 돼요.

    ◆ 추상미> 많이 봐주시면 감사할게요.

    ◇ 정관용> 그나저나 이번 영화에 직접 등장도 하는 거죠?

    ◆ 추상미> 제가 프리젠터 역할 겸 감독이니까요.

    ◇ 정관용> 꼭 그렇게만 화면에서 보여주실 겁니까? 연기는 안 하세요, 이제?

    ◆ 추상미> 많은 분들이 너무 그리워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나중에 재미있는 캐스팅 안 되는 역할이 있다면 제가 제 영화에.

    ◇ 정관용> 본인 영화에.

    ◆ 추상미> 너무 리얼할 캐릭터라 잘.

    ◇ 정관용> 앞으로 감독으로 사시겠다. 그런데 내가 만드는 영화에는 출연하겠다 그런 거죠?

    ◆ 추상미> 그런 재미있는 발상을 해 봤어요.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출연해 봐야겠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먼저 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이번에는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 준비하시던 것도 나올 거죠?

    ◆ 추상미> 내년에 이제 시나리오를 써서 내후년 정도에 크랭크인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요.

    ◇ 정관용> 다큐부터 우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추상미> 감사합니다.

    ◇ 정관용> 추상미 감독, 고맙습니다.

    ◆ 추상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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