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부터 시작된 사극 열풍이 잠잠해지자,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극장가에 찾아오고 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IMF 경제위기, 이두삼 마약 유통사건 등 대한민국을 뒤흔든 굵직한 실화들이 스크린에 그려진다.
2018년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 올 연말을 장식할 현대사 영화 세 편의 의미를 정리해봤다.
◇ IMF 일주일 전, '국가부도의 날'각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다르지만, 대한민국을 강타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꼽자면 바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일 것이다.
1997년 외환보유고가 부족했던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을 하면서 IMF 사태가 시작됐다.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해외 투자, 실패한 정부의 금융정책, 미국 금리인상으로 인한 수출감소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IMF 사태로 인해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고, 대한민국 경제기반이 흔들리면서 청년실업, 빈부격차, 고용불안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28일 개봉하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평범한 사람까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당시 비공개로 운영되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한 줄의 기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구성됐다.
김혜수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유아인이 위기를 역이용하는 금융맨 윤정학 역을, 허준호가 평범한 서민 가장 갑수 역을 연기하면서 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
각 자리에서 긴박했던 상황을 대변하는 인물들과 IMF라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교차적 구성이 이 사건을 어떻게 20년 만에 스크린 위에 펼쳐낼지 기대를 모은다. IMF가 불러온 사회 문제가 현재까지도 후유증처럼 남아있기에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질 작품이기도 하다.
◇ 거짓이 만개했던 '1991, 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셋 중 유일한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은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필두로 강기훈 씨와 당시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국가 권력의 폭력과 현재의 삶을 조명했다.
영화의 제목처럼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1991년 꽃피는 봄에 시작됐다.
그 해 4월 명지대생 고(故) 강경대 씨가 시위 중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고(故) 김기설 씨 등 전국 대학생들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차례로 분신했다. 검찰은 고(故) 김기설 씨가 작성한 유서를 강기훈 씨가 대필했고, 분신을 방조했다면서 사건의 배후로 강기훈 씨를 지목한다. 검찰에게 구속 기소돼 복역한 강기훈 씨는 2015년 5월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메가폰을 잡은 권경원 감독은 이 시기 대학을 다니며 1987년 이후 더욱 깊은 절망 속에 빠진 한국 사회와 국가 폭력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의 트라우마를 목격했다. 감독 스스로도 경험한 아픈 시간이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간암 투병 중인 강기훈 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기타 연주로 못다 핀 삶을 살아간 11명을 애도한다. 단순히 강기훈 씨 한 사람의 이야기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1991년 대학생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는지 날카로운 진실을 수면 위에 드러낸다.
◇ 암흑의 유신시대, 가장 찬란했던 '마약왕'마지막 주자 '마약왕'은 올해 개봉 예정이다.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과 송강호의 복귀작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화는 1970년대 대한민국을 뒤흔든 마약 유통사건의 배후이자 마약업계 최고 권력자였던 이두삼 이야기에 모티브를 얻어 제작됐다.
이두삼은 하급 밀수 업자로 생활하다 마약 제조와 유통에 눈을 뜨게 되면서 마약업계의 대부로 거듭나는 인물이다. 그 동안 인간적인 캐릭터 연기에 주력해 온 송강호가 과연 어떤 얼굴로 이두삼의 야망과 욕망을 연기할 것인지 눈길을 끈다.
1970년대 엄혹했던 유신정권, 마약도 수출하면 애국이 되던 시기에 이두삼이라는 인물울 통해 시대를 되돌아보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다. 시대 배경이 유신정권인만큼, 우민호 감독의 전작 '내부자들'처럼 사회 권력의 부조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치들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메가폰을 잡은 우민호 감독은 이두삼의 생을 영화화하기 위해 수년 간에 걸쳐 철저한 자료 조사와 스토리 작업을 해왔다. 송강호 외에도 조정석, 배두나, 이성민 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영화에 완성도를 더한다.
메가폰을 잡은 우민호 감독은 "마약왕은 대한민국 암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70년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맛본 한 남자가 쾌락과 권력으로 얼룩진 범죄 세계를 통해 어떻게 흥망성쇠를 겪게 되는지 그려보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힌 바 있다.
1980년대나 일제강점기를 주로 다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역사적 시선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최근의 사건까지도 얼마든지 영화화 되는 분위기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고구려까지 간 영화 '안시성'을 통해 역사물의 외연이 넓어질 것으로 기대가 있다. 과거 '현대사'라고 한다면 80년대나 일제강점기 시대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그 이후의 상황을 다루면서 무게 중심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어떤 시대를 다루든 역사적 시선으로 볼 수 있고,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기획이 가능하다. 특히 '국가부도의 날'의 경우, 그 시대를 돌아보면서 우리 사회와 경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상업 영화 기획들은 어떤 특별한 의미나 메시지보다는 현 시점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 자체가 중요해 보인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