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덕제가 지난해 11월 종로구 종로 2가에 위치한 피앤티스퀘어에서 여배우 성추행 논란과 관련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지난 2015년 영화 촬영 도중 상대 여배우의 속옷을 찢고 바지에 손을 넣는 등 여배우를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조덕제는 최근 항소심 결과 무죄였던 1심과 달리 징역 1년(집행유예 2년, 수강명령 40시간, 신상정보 등록)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윤창원기자
장장 3년 넘게 이뤄진 법정 공방이었다. 2015년 한 남배우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여배우를 강제추행치상한 혐의로 피소돼 대법원까지 간 재판에서 패소했다. 2심 판결대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령 받았다. 대법원이 남배우의 유죄를 확정한 것이다. 배우 조덕제 성폭력 사건 이야기다.
유무죄 여부가 사법부에 의해 명백히 판가름 난 이후에도 장외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피해자의 목소리를 자극적으로 보도해 여론전을 유발하는 언론의 2차 가해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덕제 사건 피해자인 배우 반민정은 지난 6일 남배우A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주최한 '더 나은 영화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촬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반민정은 '피해자'가 아닌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 나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영화계 전반이 해당 판결을 통해 현장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장을 수없이 접한 영화인 단체 관계자들도 '노출' 등 민감한 장면 촬영 시 '예산 부족' '예술' '관행'이라는 명목 아래 성폭력이 이뤄져 왔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방지책을 강구해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민정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밝혔듯이 해당 기자회견은 조덕제 사건 이후를 이야기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초점은 조덕제 사건과 같은 일들을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여론 재판의 장을 형성한 언론들에 대해서도 2차 가해에 앞장섰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피해자에 대해 '가짜 뉴스'를 유포한 조덕제 지인 이재포 기자뿐만 아니라 일반 언론 매체들 역시 이런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날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D 매체가 중심이 되어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고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몇몇 매체는 이미 형이 유죄로 확정된 남배우의 억울함을 지속적으로 실어주면서 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영화계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간의 진실 공방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이어 "언론은 가해자가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이 됐다. 피해자는 가해자뿐만 아니라 언론 그리고 언론 독자를 대상으로 싸워야 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게 됐다. 언론은 더 이상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검증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가해자에게 가해하지 않은 것을 입증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피해자가 받은 고통을 알리며 방향성을 제시했다.
배우 반민정이 6일 오전 서울 동교동 청년문화공간 주에서 남배우A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더 나은 영화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 촬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해 영화계 현장에 대한 입장을 밝힌 후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그런데 기자회견 이후 반민정 발언문은 원래 취지가 무색하도록 또 다시 조덕제와의 진실 공방·대결 구도 프레임에 활용됐다. 가해자로 판명된 조덕제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은 기사들도 있었다. 이미 법적인 판결이 명백한 사건임에도 여론을 부추기는 장외 논쟁을 언론이 앞장서서 조장하는 분위기였다. 마치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동등한 무게를 가진 것처럼 보도해 대중이 피해자를 검증하는 2차 가해가 또 발생했다.
최근에서야 '2차 가해'로 명명되고 있지만 유명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에서 언론의 이 같은 보도 행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인권 존중과 경제적 이득 사이에서 언론들은 어렵지 않게 후자를 택해 왔다. 언론이 어떤 보도를 하든 제도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최진봉 교수는 "사건의 결말과 관계 없이 언론들은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과거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낸다. 그냥 인터뷰는 재미가 없으니 선정적인 요소들을 다시 부각시킨다. 특히 인터넷 언론사의 '온라인 뉴스팀' 바이라인으로 나가는 기사들은 그런 인지가 더욱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보도 지침이나 윤리 강령 등이 강제성을 띠는 것도 아니고 그냥 권고 사안 정도일 뿐이다. 이런 문제적 기사들을 언론사가 책임지게 하고 그것이 불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유명무실하다. 2차 가해성 보도가 반성 없이 반복된다는 것은 결국 사회적으로 잠깐 비난을 당해도 언론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양비론을 내세우며 가해자의 허위 사실·비방을 적극적으로 보도해도 이를 명예훼손 고소하는 등 법적 대응을 하기도 어렵다.
법무법인 참진 이학주 변호사는 "언론들이 가해자의 주장을 비판 없이 인용 보도해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해도, 악의적인 목적이 입증되지 않는 이상 명예훼손 고소 자체가 어렵다. 도의적인 부분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법적 소송으로 쏟아지는 보도를 멈출 수는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공급자인 언론 못지 않게 수요자인 대중의 인식 변화도 중요하다. 격변한 인터넷·모바일 언론 환경 안에서 정체된 인권 감수성이 결국 피해자가 더 피해 당하는 구조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유명인 성범죄 사건에서 대중은 보통 여성이 대상인 피해 사실에 주목한다. 사건 명칭이나 증거물 등이 피해자 여성의 이름으로 라벨링되고 대중은 흥미를 가진다. '구하라 동영상' 같은 것이 그 예"라면서 "일관된 개념과 사례들은 아직도 여성 피해자들에 대한 이 사회의 공감 수준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남성 대중들의 공감도가 낮다. 여성을 평등하게 보지 않고 관찰 대상·즐거움을 채우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수요와 공급이 맞으니 이런 기사들 생산이 계속된다"라고 진단했다.
이어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이제 대중은 뉴스와 정보를 선택해서 본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과 믿고 싶은 것만 본다. 이렇게 확정편향성이 강해지니까 거짓된 정보도 그럴 듯하게 꾸며서 내보내면 그렇게 믿게 된다. 반대 의견은 제고되지 않고 나의 선입견을 강화시켜주는 정보만 찾아서 극단화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가짜 뉴스'나 가해자 의견에 쉽게 동조하게 되는 뉴스 소비 구조를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