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연세대에서 열린 아산나눔재단 '파트너십온 데모데이 2018'에 참석한 공식 미디어 파트너 '씨리얼'
미래 세대인 청소년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를 위해 비영리기관을 벤처기부 방식으로 '액셀러레이팅'한다. 돈과 네트워크가 있는 공익재단이 지원한다.
처음 들었을 땐 이게 어떤 과정인지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미래 세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추상적인 슬로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속에서 지난 4년간 장애, 저소득층, 탈북, 미혼 부모, 성매매 피해 청소년 등을 지원하는 19개 비영리기관이 85억원의 재정적 투자를 받았다. 48개 전문가 단체 등 파트너가 이들 비영리기관과 1052시간을 함께 일했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의 직접적 수혜자인 청소년은 1만 317명이다. 아산나눔재단 '파트너십 온' 사업의 이야기다. 국내에서는 처음 도입된 방식이라고 한다.
지난 14일, 연세대에서 이 프로그램의 성과를 나누는 '데모데이'가 열렸다. 파트너십 온 2기, 3기 '졸업생' 비영리기관 4곳이 직접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들 기관이 나눈 미래 세대의 고민은 매우 신선하다. 사회자는 "내 안의 편견이 깨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그동안 우리가 해본 적 없었던,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고민들이다.
◇ 발달장애인도 톨스토이를 읽을 수 있다…'피치마켓'
"'느린 학습자(발달장애인)'들은 아동기에는 뽀로로를 읽습니다. 그리고 청소년기가 되면 뽀로로를 읽고요. 성인기가 되면 뽀로로를 읽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뽀로로를 사랑하길래, 평생 뽀로로만 읽고 있을까요?"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피치마켓은 '느린 학습자(발달장애인)'를 위해 다양한 책과 정보를 쉬운 글로 만드는 곳이다. 단순히 발달장애인용 책 한 권이 더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느린 학습자도 '학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피치마켓이 가진 문제의식이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학습만 가능해지면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대화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
[평소 화재에 대한 관심과 행동방법을 숙지하여 침착하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피치마켓은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꾼다.
[항상 불이 나지 않게 조심합니다. 불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만약 불이 나면 절대 놀라지 않습니다. 불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대로 따라 합니다.]
단어를 쉬운 걸로 바꾸고, 긴 문장을 쪼개고, '행동으로 옮기다'라는 관용어구가 '물건을 옮기다'할 때 '옮기다'로 해석될 수 있어 바꿔준 형태다.
느린 학습자들은 피치마켓의 콘텐츠를 통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있다. 게임, 밥 얘기밖에 못했던 한 학습자는 이제 뉴스를 읽고 아버지에게 사드에 대한 찬반 토론을 청하고 있다고 한다.
◇ 나를 표현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미술…'우리들의 눈'
"시각장애인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데 쓸데없이 미술은 왜 하니, 그 시간에 안마나 영어 배워야 하는 거 아니니'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랍니다. 그런데 사실 미술은요, 만들고 그리기 이전에 생각하고 질문하는 훈련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감각을 발달시키고 미래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에요." (엄정순 우리들의 눈 디렉터)우리들의 눈은 미술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맹학교 미술수업을 지원한다. 1996년부터 22년 동안 이 길을 걸어온 비영리단체다.
이 단체에서 시각장애는 '결핍'이 아닌 '문화'다.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패러다임의 전환 내지 창의성 증진과도 맞닿아 있다는 게 엄 대표의 말이다. '만지지 말라'고 꾸짖는 미술이 아닌 '만지며 감상하라'는 미술이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하면 가능하다. 불모지였던 맹학교 미술수업. 지금은 전국 맹학교의 70%와 수업교류를 하고 있고 90명의 강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미술 교육 받는 게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잖아요." 일반학급 커리큘럼에 미술 과목이 당연하게 들어있듯이, 시각장애인 아이들도 당연하게 미술을 배울 수 있다.
◇ 이들을 '문제'로 볼 것이냐 '미래'로 볼 것이냐…'꿈이룸학교'
'학교 밖 청소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문제아'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 밖 청소년 가운데 실제 '문제아'로 분류되는 아이들은 6%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최초의 뉴미디어·예술 대안학교인 꿈이룸학교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학교 밖' 아이들의 손에 새로운 자기 표현의 도구를 쥐어준다. 바로 뉴미디어 매체다.
"다들 셀카를 찍기 좋아하고 자기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10대 청소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청소년들이 최근에는 기성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매우 한계를 느낀다고 해요. 좋아하는 매체를 이용해서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고 즐기는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하려고 만들었습니다." (꿈이룸학교 우소연 교장)이 학교의 학생들은 3D 프린터, 드론, 영상, 아두이노, 스피커 등의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같은 또래 일반 학교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접할 수 있을 표현의 범위를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이 아이들을 '문제'로 보느냐 '미래'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게 우 교장의 말이다.
◇ 단 한 명도 성착취 안 당하게…'십대여성인권센터'
"청소년이 담배나 술을 사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편의점에서 몰래 담배를 사다 경찰에게 적발됐습니다. 그러면 누가 처벌받을까요? 편의점 주인만 처벌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직 성매매의 상대방이 된 소녀만 처벌받도록 법이 돼있습니다. 말이 됩니까?"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십대여성인권센터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성착취 피해 아이들이 성매매로 처벌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상담을 하고, 내담자를 발굴하고, 법률 지원과 의료 지원, 생활 지원을 통합적으로 운영한다.
그런데 잘 알려진 '하은이' 사건, 이 단일 사건 하나만으로도 6명이 넘는 성매수자들을 상대로 40여 차례 소송을 치뤄야했다. 변호사 30명이 동원됐다. 이런 아이들이 2013년부터 지금까지 7천명이 넘는다. {RELNEWS:right}
그래서 센터는 '아청법(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을 개정해야 한다고 오랜 기간 강력히 주장해왔다. 아이들을 '범법자'로 보는 현행법이 개정되면 소수의 비영리기관이 홀로 감당해야 할 소모적인 일들이 법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매수자와 범죄자들은 처벌이 무서워서라도 청소년에게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법률 개정안이 지난 2월에야 겨우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여전히 법제사법위원회에는 계류돼있다.
◇ 소수의 선의만으로 이뤄내기 어려운 일들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는 "탄탄한 조직을 만드는 데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민이 필요했지만,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지내왔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영세한 비영리기관들은 지금도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다. 소수가 훌륭한 뜻을 제대로 펼치기에는 사회구조적 인프라가 열악하다.
이날 '파트너십온' 데모데이 발표는 비영리기관들이 체계적인 지원을 받고, 성장하고, 그 결과물을 모든 사회 구성원이 누릴 수 있게 되돌려주는 '선순환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들 기관들은 이제 공익재단의 품을 벗어난다. 이구동성으로 "일할 준비는 다 돼있다"고 외치고 있다. 지금부터는 우리 모두가 더 꾸준한 응원과 관심을 보내줘야 한다.
기관들에 대한 더 많은 스토리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