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혜정 씨와 생각 많은 둘째 언니 혜영 씨 (사진=시네마달 제공)
오는 13일 개봉 예정인 '어른이 되면'은 18년 만에 다시 만난 혜정-혜영 자매의 동거기를 그렸다. 어릴 적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설에 들어가야 했던 혜정 씨가, 혜영 씨와 함께 사회인으로서 살아내는 과정이 담겨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자매의 동거기'라고 했을 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어른이 되면'에는 그리 많이 담겨있지 않다. 돌봄을 강제 받는 가족들의 헌신과 희생이나 장애 당사자의 성장을 기대한 관객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했던 데에는 다큐멘터리 각본과 연출, 촬영을 도맡은 언니 혜영 씨의 분명한 관점이 있었다.
4일 낮,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어른이 되면'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배급사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가 사회를 맡은 행사에는 장혜영 감독, 윤정민 촬영감독,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장혜정 씨가 참석했다.
장 감독은 "이 영화는 굉장히 우연히 만들게 됐다. 혜정과 살기로 마음먹고 나서 지원을 알아보던 와중에, 최소 6개월 정도는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정도의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돼, 그 6개월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어차피 감당해야 한다면 이 과정을 단순히 우리만의 생활과 시간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 형태로 만들어서, 모르는 사람들도 이미 아는 사람들도 알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어른이 되면'은 펀딩을 받아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게 됐다. 윤 촬영감독은 펀딩 달성도 50% 중반대부터 고비가 왔던 경험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밝혔다.
윤 촬영감독은 "혜영 선배가 펀딩이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 작업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진행 과정 자체가 의미 있을 거라고 했다. 전 그날 집에 와서 잠을 못 잤다. 간절히 이 작업이 진행되고 완성되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런 마음이 모여서 예고편이 만들어졌는데 다행히 예고편을 통해서 더 많은 반응이 있었다"면서 "제가 몰랐던 혜정이 누나를 알아가게 돼서, 저에게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장 감독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는 "(다큐를) 찍을 때 생활이 먼저고 작품은 그다음이라는 게 원칙이었다. 혜정이 오랜 시간 시설을 살다 나왔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구성하는가, 혜정의 앞으로 삶에 대한 콘셉트를 잡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해변가에 앉하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혜정 씨와 혜영 씨 (사진=시네마달 제공)
"(혜정이) 늘상 카메라 앞에 있는 게 내 일상의 일부라고 느껴버린다면 되게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우리가 혜정을 중심으로 생활을 잘 꾸린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고, 아니면 망한 작품이 나올 거라고 봤죠. 혜정이 편안하게 느낄 때 우리도 편안하고, 그때 촬영한다는 거였어요. 작품에서도 여러 번 심적인 고비가 있긴 했어요. 그건 혜정에게서 비롯됐다기보다, 저 자신에 대한 것이었고요. 자꾸 조바심이 들었던 이유는 어떤 생활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자꾸 뭔가를 정해놓고 실행하려고 했던 관성이 내부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버려가는 과정이 영화에도 나와요. 촬영을 다 해놓고 편집을 했어요. 편집본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아, 내가 변해왔구나' 하는 부분이 있었죠. 저는 노들 야학에서 하던 모든 것을 중단하고 둘이 제주도로 떠났을 때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혜영 언니'를 포함한 제작진의 노력 덕인지, '어른이 되면'에서 혜정 씨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흥에 취해서 시상식 축하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고, 기분 상한 일이 있으면 언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든가 목소리를 크게 해 남의 말을 따라 하며, 스티커 사진이나 모아나 등 좋아하는 것에는 다소 집착적으로 보일 만큼 열광한다.
혜정 씨가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말해 준 게 있는지 묻자, 장 감독은 "혜정이 주인공인 영화이기 때문에 출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부터 어떻게 동의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각서 주고 사인하라고 할 수 없는 거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유튜브 채널에서 브이로그(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 작업했던 것으로, 다큐멘터리를 하는 데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혜정은 찍히는 걸 좋아하고, 찍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다시 보는 걸 좋아하고, 다른 분들이 같이 그걸 본다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다른 영화들은 가끔 일어나거나 나가고 싶어 하는데, '어른이 되면' 상영 때면 재미있게 본다.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땐 나가서 춤추고. 사람들이 그걸(혜정이 춤추는 것) 좋아하는 걸 아는 것 같다. 무대 체질이다"라고 전했다.
물론 '어른이 되면'은 마냥 밝고 힘차고 산뜻한 영화만은 아니다. "왜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할까"라는 혜영의 내레이션처럼, 장애 당사자가 있을 때 그 모든 부담과 책임이 가정에 돌아가는 현재 구조의 모순과 부실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그 누구도 '혼자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 감독은 "제가 생각하기에 어른이 된다는 건 당연히 법적, 물리적 조건이 있겠지만 사람이 살아갈 때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삶의 조건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다"고 밝혔다. "자립이라고 하는 것도 타인에 대한 의존 위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발달장애인 평생 케어 정책에 관한 질문도 나왔다. 혜정-혜영 자매는 이날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에도 참여한 바 있다. 혜정 씨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문 대통령이 미소 짓는 장면은 사진 기사로도 보도됐다.
4일 낮,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일권 시네마달 대표, 장혜영 감독, 장혜정 씨, 윤정민 촬영감독 (사진=김수정 기자)
장 감독은 "올해 발달장애인 국가 책임제 관련해 장애아를 둔 부모들이 청와대 농성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다"며 "이번 정부가 올여름 발달장애인 평생 종합 케어 정책을 발표했는데 그게 정말 이름만큼의 정책이었다면 굉장히 반가웠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시행되는 정책을 조금 늘리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은 살아가는 데 더 힘이 듭니다. 우리 사회가 따뜻한 모습을 보여줬는지 반성이 듭니다'라고 하신 문 대통령님의 워딩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어떤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뜨거운 분노에 가까운 것이고, 힘듦, 불행에 대한 공감보다는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거예요.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을 봐야 해요. 여기 계신 기자님들도, 저에게도, 발달장애인도 개인의 행불행이 있는데 왜 발달장애인의 불행이 더더욱 불행한 불행인지, 그 이유로 더 지원해야 한다면 (그 정책은) 필연적으로 온정적인 것이 돼요. 얼마(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갈 수 없어요. 희생과 동정과 시혜의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어요."
이날 언론 시사회에선 어느 때보다 자주, 참석자들의 말이 겹쳤다. 혜정 씨가 주위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한 까닭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거나, 영화에도 출연하는 이은경 씨의 이름을 반복해서 말한다거나, '반갑습니다'를 신나게 부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혜정 씨의 이런 '말'과 '움직임'은 분위기를 더 생동감 있게 바꿔냈다.
18년 만에 혜정 씨와 같이 살게 된 장 감독은, 시간이 흐를수록 본인이 느끼는 혜정 씨의 변화가 입체적이라고 설명했다. 장 감독은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긴 힘들지만 명확한 방향성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졌다는 거다. 더 자기 자신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다"고 밝혔다. 여전히 자기(혜영 씨)보다는 친구들을 좋아한다는 말도 함께.
"이 영화가 사실은 스크린에 올라오기까지 되게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아계신 분들 앞에서 극장에서 보여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게 되게 감회가 새로워요. '나에게는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얘기였거든요. 발달장애 형제자매를 둔 가족들, 부모님들, 당사자 스스로도 '나에게는 장애가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오래 지속돼 왔던 것 같은데, 저희의 이야기가 아직 하지 못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해요. 많은 데서 상영될 순 없겠지만, 오랫동안 스크린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봐 주시는 분들의 감상을 많이 듣고 싶어요. 결론보다는 질문을 드리고 싶어서 만든 영화입니다. 마음속에 질문을 품고 돌아가신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귀한 시간에 영화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함께 살면, 살아진다'고 말하는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은 오는 13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오는 1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사진=시네마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