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까지 진출해 온 예멘 난민, 전세계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자말 카슈끄지 암살. 중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현재 중동 지역은 예멘과 시리아의 내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 이슬람국가(IS)의 잔존 등으로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우리 경제의 큰 변수 중의 하나인 원유 가격 변동의 진앙지이기도 하고 한국 기업의 플랜트 수출의 주요 시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에 비해 아직도 우리는 중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가 중동에 관하여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점에 대한 중동 전문가의 연재글을 싣는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예멘 난민 문제 ② 순니(Sunni)/쉬아(Shia) 갈등 ③ 석유 자원이 축복인가, 저주인가? ④ 중동도 동양이다 ⑤고대 이집트 그림 문자(hieroglyph)는 상형 문자가 아니다 ⑥남한과 북한의 중동관계 ⑦ 아랍의 봄은 왜 튀니지에서 시작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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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기 전 명지대 교수
2010년 초겨울에 갑작스레 시작된 '아랍의 봄'은 다음해 전 아랍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이 지역 정치 발전의 신호탄으로 기대되었다.
또한 기존의 장기간 군림하던 독재 정권이 줄줄이 붕괴되면서 이러한 기대는 더욱더 상승하였다.
특히 튀니지의 벤 알리 정권은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12월 17일로부터 불과 한 달이 못되는 2011년 1월 14일 붕괴되었다.
무려 24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이 이렇게 허망하게 붕괴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랍의 봄 점화자 부아지지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이러한 갑작스런 정치적 변화의 시작은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Sidi Bouzid)에서 과일 행상을 하던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ed Bouazizi)의 분신 자살 시도이다.
그는 2010년 12월 17일 경찰관으로부터 행상 단속의 일환으로 본인의 전자저울이 압수되고 언어폭력을 받으면서 그 울분을 참지 못하여 시청 앞에서 분신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 소식이 주변으로 전파되면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집트 아랍의 봄 시위 장면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가 병원에서 사망하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아랍의 봄이 본격적으로 점화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자주 보듯이 매우 작은 불씨가 크나큰 결과를 초래한 한 사례이다.
튀니지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면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출발하였다.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 부기바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독립운동을 주도한 부기바가 1957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87년까지 장기간 통치하였고, 같은 해 그의 총리로 있던 벤 알리가 무혈쿠데타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 또한 아랍의 봄까지 장기 집권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장기 집권이 계속되었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 튀니지는 그간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교육 수준이 세계 17위이고 초-중학생의 수학/과학 성취도가 세계 7위이다.
2009년 국민 소득이 $7,200으로 북아프리카 국가 중 최고 이며, IMF와 세계은행도 튀니지의 경제 발전을 지중해 연안 국가 중 최고라고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매우 관용도가 높고 여성의 권한도 비이슬람 국가와 별반 차이가 없다.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름휴가지 또한 튀니지였다.
이처럼 북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개방적이고 경제 발전을 이룩한 튀니지에서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은 매우 뜻밖이다.
튀니지가 아랍의 봄의 시발점이 된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이 그 원인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경제 성장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제 성장의 혜택이 특정 지역과 소수 그룹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2대 대통령 벤 알리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벤 알리 치하의 튀니지는 수출 지향적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서 유럽과 가까운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산업 시설이 집중되면서 내륙 지방이 소외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의 결실을 벤 알리 일가와 소수의 측근이 독식하였다.
경제 성장에 대한 일반 국민의 기대는 높아가지만, 사회는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 가진 자로 이분화 되었다.
일반 국민들이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 원인이 이러한 상황이고, 이것이 폭발한 것이 바로 아랍의 봄이다.
벤 알리 정부의 가장 큰 실정은 튀니지 국가 경제의 사유화이다.
1993년 설치된 '국민단합기금(National Solidarity Fund)'은 명목상으로 사회 간접 자본 육성과 의료 복지 사업을 확충하기 위한 모금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벤 알리의 인지도 증진과 정치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사업에 사용되었다.
기금 모금은 '자발적인' 헌금에 의한 것이라지만 실제에서는 강요와 마찬가지였다.
일반 공무원은 1년의 하루분의 임금을 기부해야 하며, 농부는 1년 수익의 1%, 사업가는 고용인의 숫자에 준하여 기부해야 하고, 소규모 상인이나 사업가도 연 수입의 일정 부분을 헌납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부금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할 만큼 제재를 받았으며, 모든 관공서 업무에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심지어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도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기부금의 액수가 천문학적 숫자이지만 사용 명세서가 없으며 집행을 대통령 직속 기관에서 담당하였다.
이 금액의 상당 부분이 벤 알리 일가의 비즈니스에 투입된 것은 당연하다.
한 통계에 의하면 벤 알리와 그의 친인척들이 국가 부의 30%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 경제의 사유화로 인하여 경제가 외형적으로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수의 일반 국민들은 상대적인 빈곤을 겪게 되었고, 이것이 자스민(Jasmine: 튀니지의 국화) 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대적인 박탈감이 정치 발전의 부재와 겹치면 그 폭발력이 몇 배로 증가한다.
이는 튀니지발 아랍의 봄이 순식간에 많은 아랍 지역으로 전파된 원인이다.
모두 유사한 정치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식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벤 알리는 아들이 없기에 그의 사위를 후계자로 양성하였다.
이집트 또한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이 높은 상황에서 무바락 대통령은 그의 둘째아들 가말(Gamal)을 후계자로 키웠다.
리비아의 카다피, 예멘의 살레도 그들의 아들을 후계자로 육성하였다.
공화정이지만 왕정과 같은 종신제에 세습까지 꿈꾸는 상황이었다.
아랍의 봄이 '아랍의 겨울'로 회귀한 원인은 장기간의 독재로 인하여 시민 사회의 발전이 미비하였기에 기타 정당이나 정치 세력의 형성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튀니지에서 기존 정권의 붕괴 후 정치적 공백을 메운 것은 이슬람 정당이다.
그러나 이들 이슬람 정당을 국민의 절대다수가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튀니지를 포함한 다수의 아랍 공화국에서는 국민의 약 30% 정도가 이슬람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기에 전체적인 투표율이 50% 정도이다.
그러므로 선거에서는 동원력이 뛰어난 이슬람 정당이 승리하게 된다.
온건 이슬람 정당이면 문제가 덜하지만 이슬람원리주의자 또는 과격이슬람세력이 정권을 잡을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국가 안에는 온건주의 무슬림, 자유주의자, 진보, 보수 등 다양한 분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경과하면서 일반 국민들의 이슬람 정권에 대한 반발이 높아가는 것이다.
이집트 전 대통령 무르시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그 결과 이집트에서는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ursi) 이슬람 정부가 군사 쿠데타로 붕괴되었고, 튀니지에서도 엔나흐다(Ennahda) 이슬람 정권이 붕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리비아, 예멘 등은 내전 상황으로 진입하였다.
아랍의 봄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가장 많이 대두되었던 이슈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을 포함한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역할이다.
SNS의 확산이 아랍 국가의 정치 변화에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랍의 봄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대중 매체에서 아랍의 봄을 보도하면서 사용한 '페이스북 혁명' '유튜브 혁명' 등의 용어는 SNS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예를 들면 튀니지 전체 국민 중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숫자가 30% 정도이다.
또한 벤 알리 정부는 자주 인터넷서비스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SNS의 역할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의 역할에 대한 찬반론이 계속 진행 중이다.
그러나 SNS가 시위 군중의 정보 통신 교환에 공헌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즉 SNS가 아랍의 봄에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도 1980년에 '서울의 봄'을 겪었다.
그러나 다시 겨울로 회귀하면서 1993년에야 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아랍의 봄도 진정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인 박찬기 전 명지대 교수는 한국중동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메나코르 대표이사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