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 해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여성 예능인들. 왼쪽부터 이영자, 박나래, 송은이, 김숙 (사진=MBC '방송연예대상', KBS '연예대상' 캡처)
2018년 방송가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올해 사회 전 영역을 흔든 '미투(#Me_Too, '나도 말한다'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밝히는 것)'를 피해갈 수 없었다. 방송사들이 파업을 마치고 돌아와 '정상화'를 위해 노력 중이지만, '관행'이란 명목 아래 계속된 초장시간 노동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여전하다. 전통 강자로서의 존재감을 잃은 지상파가 고군분투한 반면, tvN으로 대표되는 케이블과 종편은 알짜배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넷플릭스-유튜브 등 자체제작이 가능한 플랫폼 기업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여성 캐릭터가 도드라진 드라마와 여성 단체 예능의 등장, 최초로 한 해에 연예대상 2관왕이라는 기록을 쓴 이영자를 비롯해 어느 때보다 '열일'한 여성 예능인들의 활약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 이영자 연예대상 2관왕 등 여성 예능인들 강세… 드라마 속 여성 서사도 다양해져
사실 '여풍'(女風)이라는 말은 새삼스러울 수도, 과장돼 보일 수도 있다. 그동안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을 뿐,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여성들은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재능과 가능성을 가졌어도, 슬그머니 지워지거나 흐려지는 일이 빈번했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여성 예능인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빛냈고, 그것이 온당한 평가를 받은 한 해였다. 데뷔 27년이 된 관록의 방송인 이영자는 MBC-KBS 두 방송사에 대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두 번의 대상을 받았다. 여성 예능인이 한 해에 2관왕을 차지한 것은 사상 최초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를 쓴 셈이다. KBS 연예대상은 개최 이후 첫 여성 대상을 배출했고, MBC 방송연예대상은 2001년 박경림 이후 17년 만에 이영자에게 대상을 안겨 각각 의미가 있었다.
2년 연속 대상 후보에 오른 박나래는 '나 혼자 산다', '비디오스타', '박나래의 복붙쇼', '놀라운 토요일', '연애의 맛', '짠내투어', '풀 뜯어먹는 소리', '마이 매드 뷰티 2', '투유프로젝트-슈가맨2' 등에 출연하며 알찬 한 해를 보냈다. 갤럽 '올해를 빛낸 예능인' 2위로 꼽혀 대중성을 재확인했다.
이뿐일까. 불러주는 곳이 없어 한때 진지하게 적성을 고민했던 송은이는 진행자, 출연자를 넘어 '새싹 PD'로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숙크러쉬' 김숙은 현재 지상파-케이블-종편을 넘나들며 TV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예능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고정 출연자가 모두 여성인 예능 JTBC4 '비밀언니', 올리브 '밥블레스유', 라이프타임 '파자마 프렌즈', tvN '주말사용설명서'는 모두 올해 첫선을 보인 프로그램이다. 생각지 못했던 상대와 동거를 하며 우정을 쌓는다든가, 서로를 깎아내리지 않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나와 사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JTBC '효리네 민박'에서도 집주인 이효리와 직원 윤아가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가 볼거리 중 하나였다.
윗줄 왼쪽부터 JTBC '미스티', tvN '나인룸', tvN '마더', 아랫줄 왼쪽부터 KBS2 '땐뽀걸즈', JTBC 'SKY 캐슬', MBC '이별이 떠났다' (사진=각 방송사 제공)
올해는 여성 캐릭터가 중심을 잡는 드라마를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다분히 목표지향적인 1등 앵커 고혜란(JTBC '미스티'), 직장 내 성희롱 사실을 공론화하며 한 단계 성장하는 윤진아(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섬세한 눈으로 약자를 먼저 바라보는 판사 박차오름(JTBC '미스 함무라비'), 망한 조국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고애신과 쿠도 히나(tvN '미스터 션샤인'), 보육원 출신 입양아여서 학대당했으나 실력과 노력으로 집안의 인정을 쟁취하려는 민채린(MBC '숨바꼭질'), 외모 콤플렉스를 본인 힘으로 극복하는 강미래(JTBC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실력과 재력은 물론 품성까지 갖춘 호텔 CEO 차수현(tvN '남자친구') 등을 꼽을 수 있다.
tvN '마더', MBC '이별이 떠났다', SBS '시크릿 마더', JTBC 'SKY 캐슬', tvN '나인룸', KBS2 '땐뽀걸즈' 등 두 명 이상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극을 이끌거나 여성 연대를 보여준 작품이 꾸준히 시청자들을 만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흐름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이어진다. 사람들에게 들릴 기회를 얻지 못했던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시사 프로그램 KBS1 '거리의 만찬'은 MC 세 명(박미선·김지윤·김소영)이 모두 여성이다. 김지윤 박사는 MBC '100분 토론' 진행자이기도 하다. KBS1 '저널리즘 토크쇼 J', KBS1 '추적60분', KBS 1라디오 '열린토론'은 각각 정세진 아나운서, 최지원 CP, 김진애 도시계획학 박사가 진행을 맡았다.
◇ 파업은 끝났지만, '방송 정상화'는 진행형지난해 9월 4일 공동 파업에 들어간 KBS-MBC 중 먼저 돌아온 곳은 MBC였다. KBS는 141일이라는 최장기간 파업 기록을 세웠고, 올해 1월에야 이사회에서 고대영 사장이 해임됐다. YTN은 최남수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파업을 83일 동안 진행했고, 올해 7월에야 새 사장을 맞았다.
사장이 바뀌고, 사장 선임권을 지닌 이사회 구성까지 달라진 상황. 방송사들은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제작자율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시청자들을 위한 방송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선 해직자들이 보도국 수뇌부(MBC 박성제 보도국장, YTN 현덕수 보도국장-조승호 보도혁신본부장)로 돌아왔다. 데일리 시사(KBS1 '오늘밤 김제동), 미디어 비평(KBS1 '저널리즘 토크쇼 J), 탐사보도(MBC '스트레이트'), 새로운 뉴스(YTN '노종면의 더뉴스') 등 시사 부문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MBC 'PD수첩'은 김기덕-조재현 미투, 조계종 설정스님의 비리 의혹 등을, KBS '뉴스9'는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황제보석 논란, 교정시설 비리 연속 고발 등을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노컷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MBC '스트레이트'의 주진우 기자와 KBS1 '오늘밤 김제동'의 방송인 김제동에 대한 편향성 공격, '적폐청산'을 둘러싼 내부 갈등, 관행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각종 부당노동행위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올해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던 '주 52시간 근로' 도입은 방송가의 고질적인 '초장시간 노동' 현실을 되새기게 했다. 수많은 드라마 현장에서 하루 20시간이 넘는 노동이 이뤄지고 있어 스태프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방송스태프노조가 생겨 '하루 12시간 노동'을 주장하지만 '원청'인 방송사의 태도는 소극적이기 그지없다. 지상파 3사가 참여하는 '드라마 제작 환경 개선 특별협의체'는 개점휴업 중이고, CJ ENM, SBS 등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용기 있는 고백 '미투'는 방송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재현은 드라마 방송 중 '미투'가 나와 도중 하차했고 오달수와 최일화도 첫 방송을 앞둔 드라마에서 빠졌다.
언론계 종사자가 '미투'를 통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YTN은 가해자로 지목된 PD와 기자에게 각각 해고와 정직 6개월을 내렸다. MBC는 성폭력 가해 사실이 확인된 직원 3명을 해고했다. KBS는 2명의 피해자가 확인된 PD에게 정직 3개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기자에게는 '주의' 처분을 내렸다.
성폭력-성추행 사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받은 KBS는 지난달 방송사 최초로 성평등센터를 개소해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처리 및 성평등 조직문화 구현을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지난달 27일 열린 '장시간 촬영 및 턴키계약 강요하는 MBC 규탄 기자회견' 당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들고 나온 피켓들 (사진=김수정 기자/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