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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 된 중동…왜 그럴까?



인권/복지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지역이 된 중동…왜 그럴까?

    [중동, 어디까지 아니?] ⑧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은 무엇인가?

    제주까지 진출해 온 예멘 난민, 전세계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자말 카슈끄지 암살. 중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현재 중동 지역은 예멘과 시리아의 내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 이슬람국가(IS)의 잔존 등으로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우리 경제의 큰 변수 중의 하나인 원유 가격 변동의 진앙지이기도 하고 한국 기업의 플랜트 수출의 주요 시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에 비해 아직도 우리는 중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가 중동에 관하여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점에 대한 중동 전문가의 연재글을 싣는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예멘 난민 문제
    ② 순니(Sunni)/쉬아(Shia) 갈등
    ③ 석유 자원이 축복인가, 저주인가?
    ④ 중동도 동양이다
    ⑤고대 이집트 그림 문자(hieroglyph)는 상형 문자가 아니다
    ⑥남한과 북한의 중동관계
    ⑦ 아랍의 봄은 왜 튀니지에서 시작되었는가?
    ⑧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은 무엇인가?


    박찬기 전 명지대 교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 등의 중동 국가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건설된 국가들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국가 건설이 당시 근시안적인 젊은 외교관 사이크스와 피코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 더욱더 놀라운 일이다.

    약 500년에 가까운 오스만 제국의 중동 통치 기간에는 이러한 국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요르단 남부의 와디 럼. 아라비아의 로렌스 촬영장소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당시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지역은 통틀어서 대 시리아라 칭하였고 이라크 지역은 메소포타미아라 불렀다.

    이와 같이 이 지역은 국경이라는 것이 없이 유목민과 상인들이 자유스럽게 이동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국경이 설정되면서 이들의 생활 패턴이 붕괴되고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건국 이후부터 계속적인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가 형성되기에는 오랜 역사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국경 개념이 설정되어야 하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며, 정체성은 무엇이며 등이 먼저 구비되어야 하지만, 이와 같은 인위적인 국가들은 먼저 지도자를 정하고 그다음 국경과 국민을 확정하고, 통치 체제를 만드는 등 역피라미드형의 국가 건설 과정을 겪었다.

    그러므로 국가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훨씬 더 강한 결과를 초래했다.

    즉 모든 사회 구성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그러므로 국가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사회적 분열이 가중되면서 계속적인 쿠데타와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혼란이 1960년대 강력한 독재 정치 체제가 들어서면서 안정되었다.

    중동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과 정치 발전의 부재를 일반인들은 정교일치의 이슬람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인위적인 국가 건설 과정이 정치적 불안을 태동시킨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1914-1918)에 현재의 중동 지역, 특히 레반트(Levant) 지역에 관한 문제를 태동시킨 세 가지의 협약이 있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영토 분할 계획도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첫째는 1915년의 후세인-맥마흔 서한이고, 둘째는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며, 마지막은 1917년의 발포어 선언이다.

    물론 그 당시는 1차 세계 대전 기간이었기에 승전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이들 세 가지 협약은 서로가 공존할 수 없는 모순된 내용이었다.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아랍인들이 반 오스만 제국 반란을 일으켜 전쟁의 승리에 협조할 경우 전후 범아랍국가를 건설해 준다는 영국의 약속이었다.

    그 결과 당시 메카 지역을 통치하던 세리프 후세인의 셋째아들 파이잘과 영국인 로렌스(일명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러한 약속을 믿고 반 오스만 전쟁을 수행하여 다마스쿠스까지 진격하였다.

    파리 평화회담 당시의 파이잘과 로렌스: 앞 줄 중앙이 파이잘,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로렌스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그러나 후세인-맥마흔 서한 다음해에 영국과 프랑스는 범아랍국가 건설을 약속한 지역을 전후에 두 국가가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었다.

    아랍인들을 기만하는 양국 간의 비밀 협정이었다.

    마지막의 발포어 선언은 전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해준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끝없는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모순된, 또는 상호 배타적인 협약이 전쟁 종결 후에 근본적인 재고 없이 실행되면서 오늘날 중동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정치 지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들 세 가지 협정 중에 중동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다.

    사이크스(Mark Sykes)는 캠브리지대학교 재학 중에 이스탄불, 다마스쿠스, 모술 등지를 여행하였고 보어(Boer)전쟁에 참전한 뒤 이스탄불에 위치한 영국 대사관에 명예공사로 근무했다.

    이러한 얄팍한 중동 경험자이지만 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그는 중동 전문가로 변신하여 영국의 대 중동 정책 구상에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조르주-피코(François Georges-Picot)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주 베이루트 프랑스 총영사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근무 당시 그는 아랍 장교, 변호사, 언론인 등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이들은 피코에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아랍의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오스만 제국에 투자된 경제적인 국익을 고려하여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1914년 11월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이 임박하자 그는 베이루트를 떠났다.

    피코는 곧 주 영국 프랑스 대사관에 파견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협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1916년 1월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합의하였다.

    그 내용은 지중해 연안의 아크(Acre)에서 키르쿠크(Kirkuk)를 지나 페르시아 변방까지 연결하는 선에서 상/하 지역을 양분하는 것이었다.

    위의 지역은 프랑스가, 아래 지역은 영국이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국제적 통치하에 두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러시아의 동의를 얻은 후 1916년 5월 협정 서류를 양국이 교환하면서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 타결되었다.

    이 협상은 당분간 비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전후 세력권을 분배하는 시기상조적인 양국의 처사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회피하고, 제국주의 말기에 제국을 확대한다는 시대적 조류에 반하는 처사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완쪽부터)사이크스, 피코 (사진=박찬기 교수 제공)

     

    이러한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 전후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등 인위적인 국가 건설의 기본 틀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 협정의 내용이 완벽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고 다소의 수정 또는 변경이 있었다.

    우선 제정러시아도 이 협정의 동참자로서 전후 흑해 입구 지역의 오스만 제국 영토를 할애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7년 볼셰비키혁명군이 이 비밀 조약을 공개하면서 제정러시아의 몫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알렉산드레타(Alexandretta) 등 시리아 북서쪽 지중해 연안 지역은 터키에 귀속되었으며, 모술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국제적 통치에서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은 레반트 지역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국경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협약이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고려했다면 현재와 같은 문제점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2016년은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 체결 된지 정확히 100년이 되었다. 100년 동안에 이 지역은 어떻게 변했는가?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보면 그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 대부분이 제대로 된 국가로서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 지역의 정치적 불안의 씨앗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뿌려진 것이다.

    전 세계를 경악시킨 이슬람국가(IS)의 수장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도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을 허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뿌려 논 인위적인 국가 건설의 문제가 먼 훗날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저자인 박찬기 전 명지대 교수는 한국중동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메나코르 대표이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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