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제공)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 간 감정이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이 요청한 한일 청구권 협정 상의 '외교적 협의'를 두고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당분간 한일관계의 냉각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 연이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양국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판결과 관련해 일본 고위 관료들의 감정적인 '막말'이 이어지자 우리 정부는 총리실과 외교부 차원에서 입장을 내고,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며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토대로 양국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맞서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들어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같은 입장을 다시 강조하면서 일본 측의 반발이 곧바로 이어지는 등 갈등은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양상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는 조금 더 겸허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것은 한국 정부가 만들어낸 문제들이 아니다. 과거의 불행했던 오랜 역사 때문에 만들어지고 있는 문제"라면서 "그런 문제를 정치적 공방 문제로 삼아 미래지향적 관계까지 훼손하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이를 두고 일본 언론과 고위 관료들은 문 대통령이 '일본이 강제징용 판결을 정치쟁점화하고 있다'고 언급한 점에 주목하며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쏟아냈다.
중도 성향 아사히 신문은 기자회견에 대해 "문 대통령이 한국측의 대응에는 문제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대응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나타냈다"며 "한일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사토 마사히사 외무성 부대신도 트위터에 "문 대통령은 '일본은 불만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문 대통령이 "일본 정부도 불만이 있더라도 한국 사법부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고 한 발언을 거칠게 해석한 것이다.
더구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이번 3·1절을 전후해 일본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 집행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갈등은 당분간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부는 당장 일본이 요청해 온 '외교적 협의'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고심 중이다.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마련할 태스크포스(TF)를 세우고 대응방안을 모색 중이다.
한일 청구권협정 3조 1항은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 측은 이에 따라 강제징용 문제를 '외교적 협의'로 해결하자는 요청을 해온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만일 한국 정부가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청구권 협정에 근거, 제3국의 위원을 포함한 중재위원회 개최를 요청할 준비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는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 단계별 대응을 추진해 국제사회에 일본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등 여론전을 펼친다는 것이 일본의 계획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우리가 2011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협의를 요청했을 당시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응하지 않았던 사례도 있는만큼 외교적 협의 요청을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곧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법적 조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일본 측의 협의 신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외교적 부담이 따를 수 있다.
이에 정부는 이번 협의에서 강제징용 문제 외에 위안부 등 기존 우리 정부의 요청을 포함할 지 여부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일본으로서도 한번 거절했던 과거사 문제가 협의 내용에 포함돼 공식화되는만큼 셈법이 복잡해진다.
일본의 주장대로 국제법상 해결을 모색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문제 해결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한 외교소식통은 "만일 일본이 진다면 전쟁 피해 국가들에서 대거 소송전이 벌어질 수 있는데 이를 일본 국민이 받아들이겠는가. 또 한국이 진다면, 엄연히 피해자가 있는 과거사 문제를 그냥 그 판결 하나로 덮어야 하는 것인가"라며 진정한 사과가 선행돼야 하는 과거사 문제를 법적으로만 풀기에는 딜레마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