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화재사태 피해자 법률대리를 맡은 하종선 변호사가 지난해 8월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BMW 화재 관련 공청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우측은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 윤창원기자
2015년, 독일 폭스바겐 그룹의 디젤게이트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비슷한 즈음에 하종선 변호사에게 평소 알고 지냈던 한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일 유학파였던 그 교수는 평소 독일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던 사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독일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문의했다. 하 변호사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 8개 회사, 총 6500명… 수년째 이어진 싸움BMW 화재 피해자모임의 법률대리인 하종선 변호사가 2019년 현재 변론 중인 자동차 소송만 9건이다. 회사만 8곳에 달하고 소송 참여인원은 6,500명이다.
지난 2015년 9월,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사건을 시작으로 닛산 캐시카이 배출가스 조작, BMW 화재,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주행 중 시동 꺼짐, 만(MAN) 트럭 결함 소송 등을 맡고 있다.
긴 싸움의 시작은 한 지인의 부탁에서 시작됐다. 하 변호사는 "평소 알고 지내던 교수가 부탁했다"며 "독일에서 공부를 해 평소 독일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던 그 교수가 어느 날 연락이 와 '이건(디젤게이트) 좀 아닌 것 같다'며 소송을 문의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폭스바겐과의 피해배상 소송이 길어야 1~2년 안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폭스바겐이 미국 연방환경청(EPA)와 캘리포니아 주환경청(CARB)의 강도 높은 조사에 배출가스 소프트웨어 조작을 인정하는 등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행정당국은 이번 일이 단순 리콜로 끝낼 문제가 아닌 환불은 물론 피해차주 보상금, 오염제거 비용까지 내라며 압박했다.
미국 사법부도 소비자에게 힘을 보탰다. 집단소송을 담당한 찰스 브라이언 판사는 폭스바겐이 합의하지 않을 경우 '벤치 재판(bench trial)'을 열겠다며 빠른 해결을 요구했다. 벤치 재판은 배심원 없이 1명 혹은 소수의 판사가 심리하기 때문에 판사의 권한이 크다.
결국 폭스바겐은 디젤게이트 발생 약 9개월 만인 2016년 6월, 미국 정부에 배상안을 내놓았다. 총 보상금만 18조 원으로 차량 환불에 11조 원, 차주 1인당 보상금 1,162만 원, 오염제거 및 친환경기술진흥금 5조 5,000억 원을 내놓았다.
하지만 12만 대의 차가 돌아다닌 한국에선 아직도 배상안을 내놓지 않았다.
폭스바겐은 미국과 한국의 배출가스 기준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일 배상이 불가한 것은 물론 조작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사과의 뜻으로 100만 원짜리 쿠폰만 건넸다. 결국 2015년 시작된 민사소송은 1심 판결조차 나오지 않은 채 4년째 이어지고 있다.
◇ 기업만큼 정부도 문제… "이길 수가 없다"하 변호사는 "한국 소비자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고 있다"며 "소비자가 이길 수가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유독 한국에서만 기업이 소극적으로 보상에 나서는 데는 한국 정부와 법의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과 싸워봐야 연전연패"라며 "지난 2000년 대우자동차 급발진 사고 당시 소송에서 처음으로 1심에서 이겼지만 2심에서 바로 뒤집혔다"고 설명했다.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수사와 관련해 지난 2016년 검찰에 소환된 폭스바겐 독일본사 배출가스 인증 담당 임원 데틀레프 슈테델 씨. 황진환기자
지난 2016년 8월, 환경부는 디젤게이트를 일으킨 폭스바겐 32개 차종에 대한 인증을 취소하며 강도 높게 나섰다. 또 폭스바겐이 불법조작을 인정하지 않으면 리콜 계획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지만 돌연 5개월 뒤 리콜을 승인했다.
결국 정부가 솜방망이 처벌로 면죄부를 주면서 정작 피해 당사자인 차주들은 보상을 위해 홀로 법정에 오르고 있다.
법정에 가더라도 기업과 싸워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다. 원고인 소비자가 결함 등 문제를 직접 밝혀야 하는 상황도 답답하지만 이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조차 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결함입증에 대해서 원고한테 과중한 입증책임을 부과하고 있다"며 "기업은 웬만한 자료는 영업비밀이란 이유로 내지 않고 재판부도 이를 받아주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함 입증에 있어 '설계변경'과 같은 자료가 중요하지만 소비자가 이를 받아내기란 한국에선 사실상 불가하다"고 덧붙였다.
국토교통부 민관합동조사단은 지난해 12월 24일 BMW 화재사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BMW가 1차리콜 시정대상을 축소했고 고의적으로 EGR 밸브 결함을 은폐·축소했다고 밝혔다.이에 BMW를 검찰고발하고 과징금 112억원을 부과하겠다고 밝혔다.황진환기자
그는 징벌적 손해배상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디스커버리 제도'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시행 중인 디스커버리 제도는 쉽게 말해 재판에 앞서 양측이 상대방 혹은 제3자로부터 소송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요구해 받는 절차다. 일종의 증거수집이다. 이는 일반 소비자가 국가나 의료단체, 기업을 상대로 다툴 때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하 변호사는 "수사기관이나 정부 조사단이 아니고선 기업 내부자료를 받을 수 없는 한국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만큼이나 '디스커버리 제도'가 필수적"이라며 "징벌적 손해배상도 우선 결함을 입증해야 이뤄질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 하종선 "올해, 소비자 위한 획기적 한 해"하 변호사는 올해를 한국 자동차 소비자에게 있어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 4년을 끌어온 폭스바겐 민사소송 1심이 올해 상반기 선고될 예정이고 BMW 화재사태 결함은폐도 3월 재판을 시작해 올해 안에 1심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줄줄이 나올 판결에서 그가 기대하는 것은 그동안 한국 소비자는 누리지 못했던 '차량 환불'과 '결함은폐 처벌'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하 변호사는 "자동차도 전자제품처럼 교환 환불을 과감하게 하는 제품이 돼야한다"며 "그런
업계가 살아남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점은 독일에서 폭스바겐을 상대로 소송을 낸 개인들이 최근 전액환불 등 승소하는 일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하 변호사는 "폭스바겐과 BMW 소송은 우리나라 수입차 소송의 지형을 바꾸는 획기적인 랜드마크 판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