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규 한국체대 교수(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가 지난해 10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대한체육회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또 다시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대한빙상경기연맹에서 영원히 물러나기로 한 '빙상계 대부' 전명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다.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 심석희(한체대)의 폭행 및 성폭행 피해 파문 속에 전 교수의 이름이 또 등장했다. 심석희에 대한 가해자로 지목된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의 배후에 전 교수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다.
심석희는 지난 8일 법률 대리인을 통해 "만 17세였던 2014년부터 조 전 코치가 4년 동안 상습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당해온 구타 등 폭행을 넘어 성적으로도 핍박을 받아왔다는 것이었다. 국가대표 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에서 성폭행이 이뤄졌다고 폭로해 충격을 안겼다.
일단 조 전 코치 역시 법률 대리인을 통해 성폭행은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심석희의 폭로로 유도와 태권도, 정구 등 다른 종목에서도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선수들이 나오면서 체육계 미투 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조 전 코치의 배후에 전 교수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미 조 전 코치는 지난해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옥중 편지를 통해 전 교수의 폭행과 폭언을 밝혔다.
당시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조 전 코치의 편지에는 "전 교수가 한체대 선수들의 성적이 더 좋아야 한다고 매우 압박했다"는 내용이 있다. "폭언과 욕설, 폭행까지 당했다"며 조 전 코치는 "윗사람의 압박에 직업도 잃고 설 자리가 없어질까 봐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일단 전 교수는 당시 국감에서는 "폭행과 폭언은 없었다"고 부인한 바 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하던 조재범 전 코치의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DB)
최근 일부 매체에서는 전 교수가 국정 감사를 앞두고 폭행과 관련한 책임을 조 전 코치에게 전가했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젊은빙상인연대 여준형 대표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조 전 코치에게 들으니 '전 교수가 집으로 불러서 (폭행에 대해) 네가 다 책임져라'고 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다만 여기에는 일견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다. 심석희와 국가대표 후배 최민정(성남시청), 조 전 코치 사이의 관계다. 조 전 코치와 스승 격인 전 교수의 관계도 난해한 부분이 있다.
조 전 코치의 옥중 편지에는 '고교 시절 한체대 빙상장에서 훈련하던 최민정이 한체대가 아닌 연세대로 진학했고, 전 교수가 한체대(선수)가 무조건 더 잘 나가야 한다고 압박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심석희가 1등 못하면 각오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또는 승부를 조작해서라도 1등을 시켜라'는 전 교수의 압박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심석희는 이와 반대의 주장을 폈다. 심석희는 지난달 조 전 코치의 상습상해 및 재물손괴 사건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조 전 코치가 특정 선수를 밀어주기 위해 자신의 스케이트 날을 바꾸고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심석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특정 선수는 최민정이다.
조 전 코치는 전 교수가 최민정 대신 심석희 등 한체대 선수들의 성적을 좋게 하라고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만약 조 전 코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전 교수는 공정해야 할 국가대표 경쟁에 관여해 스포츠맨십에 어긋난 지시를 내린 것이 된다.
하지만 심석희는 조 전 코치의 옥중편지 내용을 반박했다. 실제로는 조 전 코치가 최민정을 밀어주기 위해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것이다. 만약 심석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조 전 코치가 부적절한 압박을 가한 모양새가 된다.
심석희는 2013년 중학생 시절부터 여자 쇼트트랙 에이스로 우뚝 섰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을 휩쓸었고,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는 장염 여파로 개인전에서는 우승하지 못했으나 마지막 3000m 계주에서는 눈부신 역주로 금메달을 이끌었다.
하지만 소치올림픽 이후 최민정이 무섭게 치고 나섰다. 심석희와 함께 장거리에서 경쟁한 최민정은 역시 국제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에이스 자리를 꿰찼다. 지난해 평창올림픽에서는 1500m와 계주까지 2관왕에 올라 쇼트트랙 여제를 입증했다.
쇼트트랙 최민정(왼쪽)과 심석희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 계주 3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포옹을 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사실 정상급 기량의 두 선수 사이의 묘한 기류는 빙상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나뿐인 금메달을 놓고 달려야 하기에 경쟁은 당연했다. 같은 매니지먼트 회사 소속이던 두 선수는 인터뷰마다 "서로 배우며 발전하고 있다"며 격려했다. 그러나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고, 결국 올림픽 뒤 최민정이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했다.
조 전 코치와 전 교수 사이도 난해한 구석이 있다. 일부 매체들은 전 교수가 탄원서를 받는 등 조 전 코치의 감형을 위해 나섰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조 전 코치 폭행의 배후에 전 교수가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 전 코치의 옥중편지는 전 교수의 폭언과 폭행에 대한 폭로가 주된 내용이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서는데 제자는 스승을 공격하는 모양새다. 일견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다.
이 모든 상황은 전 교수가 해명해야 할 부분이다. 전 교수는 평창올림픽을 전후로 불거진 여러 의혹에 대해서도 함구로 일관했고, 연락처도 바꾸며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국회 국정감사에 나왔지만 국회의원들의 질타 속에 시간이 부족해 의혹들에 대한 해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성폭력 사태는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본인은 부회장에서 사퇴하고 연맹에 영구히 발을 붙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직접 입을 열어야 할 중차대한 사태다. 한체대도 이 사태를 중하게 여기고 18일 긴급 교수회의를 열어 전 교수에 대한 안식년을 취소하고 추후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빙상계에 따르면 전 교수는 조 전 코치의 옥중 편지 폭로에 대해 "어떻게 내가 가르친 제자에 맞서 싸우겠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자기(조 전 코치)도 살기 위해서는 나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면서 "다 내가 안고 가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는 전언도 들린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진상 조사와 대책을 지시한 사안이다. 전 교수는 극도로 언론과 접촉을 피하는 방법으로 일관했지만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폭행 배후는 물론 성추행 및 승부조작 전력 지도자들의 복귀에도 관여했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한국 빙상을 이끌어온 대부라면 현재 혼란에 빠진 빙상계를 위해서라도 전명규 교수가 나서서 입을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