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형제로 둔 조승우 군과 엄마 문혜경 씨. 사진=푸르메재단 제공
장애인을 형제로 둔 '비장애 형제.' 한 가정 안에서 장애형제와 함께 커가는 비장애 형제자매는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경우가 많다. 장애형제를 돌보느라 지친 부모를 곁에서 지켜보며 '아프지 않은' 자식으로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분투하고, 장애형제에게 모든 걸 양보하는 동안 쉽사리 말하지 못한 고민을 쌓아둔 채 남모를 소외감을 겪는다.
◇ 발달장애를 가진 형과 동생 사이에서
올해 18살, 고3이 된 승우는 어려서부터 혼자인 삶에 익숙하다. 발달장애를 가진 2살 터울의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해 장애인 보호시설을 다니고, 자폐성 장애를 가진 5살 터울의 동생은 활동보조인과 등하교를 하고 방과 후 주간보호센터에 간다.
의사표현이 서투른 형과 소리를 지르고 돌발행동이 잦은 동생. 엄마 문혜경 씨는 장애가 있는 두 아들의 치료에 전념하느라 승우에게 늘 미안하다. "하루는 치료실 다녀오는 동안 승우한테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요. 꼼짝도 못하고 비를 맞았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아파요."
학원 가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는 승우는 어릴 적부터 장애형제를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초등학생 때 한창 친구들과 나가 놀고 싶어도 번번이 '지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어디를 혼자 못 가니까 누군가 데려다줘야 했어요. 친구들한테 먼저 놀고 있으라고 하고 제가 다녀왔죠." 한번은 길 가는 동생을 보고 놀려대는 동네 친구와 싸웠고,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애형제들과 자라면서 소외감을 느꼈을 승우에게 늘 미안하다는 엄마. 사진=푸르메재단 제공
장애형제와 갈등이 생기면 '참는 역할'은 늘 승우 몫. 엄마가 "형이랑 동생이 아프니까 네가 이해해야 한다고, 항상 네가 좀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었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내색하지 않던 승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라고 하자 승우는 "그때는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온 가족이 외출할 때면 엄마는 막내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혼자 두었다가 차도로 뛰어들거나 소리를 질러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봐서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부모로서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을 함께 받는 승우가 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 생애 첫 백두산 천지 오르며 한 걸음 성장맞벌이 부부로 아이 셋을 양육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힘에 부친다. 두 아이의 재활치료비와 생활비로 가정 형편이 빠듯한 탓에 포기하는 것들이 늘 많다. 그럼에도 승우가 계속 학업에 매진하기를 엄마는 간절히 바란다. 다행히 푸르메재단과 태광그룹 일주학술문화재단의 도움으로 작년 한 해 동안 비장애형제자매를 위한 교육비를 지원받게 됐다.
엄홍길 대장과 함께 하는 백두산 비전캠프에 참여했던 승우와 중고등학생 참가자들. 사진=푸르메재단 제공
국어학원을 열심히 다니더니 성적이 올랐다며 씽긋 웃는 승우. "학원 다니면서 알게 된 게 많아졌어요. 너무 어려웠던 문법과 시를 배워서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엄마는 교육비 지원사업 덕분에 승우가 멀리하던 과목에 흥미를 갖게 되어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과목에 비해 제일 취약했던 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었는데 영어와 수학학원 그 이상으로는 저희 형편에 부담이 됐었거든요. 정말 좋은 기회였죠."
지난 해 6월 승우는 난생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장거리 여행도 다녀왔다. 30여 명의 중‧고등학생 친구들과 함께 푸르메재단·태광그룹 일주학술문화재단이 주최한 <백두산 비전캠프="">를 다녀온 것이다. 영화 '히말라야'를 통해 알게 된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였다.
승우는 3박4일 내내 '맏형'으로서 동생들을 살뜰히 챙겼다. 장대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 천지로 향하는 1442계단을 오르는 동안 힘들어 하는 참가자에게 업히라며 등을 내밀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친 기색 없이 올랐다. 3시간의 등정 뒤 마주한 맑고 투명한 천지의 절경.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벅찬 광경이어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백두산 천지에 오르면서 어린 동생들을 세심하게 챙겼던 승우. 사진=푸르메재단 제공
승우는 또래 친구들을 배려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한 최우수 참가자로 뽑히기도 했다. 워낙 말수가 적고 힘든 내색을 안 하면서도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는 승우가 엄마는 잘 자랐다고 뿌듯해한다.
"비전캠프를 갔다 오더니 마음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가족들과 외식은 물론 여행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예요. 학교에서 현장학습 말고는 가본 적 없던 승우가 처음으로 아는 사람 없이 여행을 다녀왔던 거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 자신의 삶을 살아낼 준비승우의 장래희망은 항공정비사다.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직업을 알아보다가 정비사가 되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대학은 항공기계과로 진학하고 싶어요."
장애형제에 대한 부담을 남은 자식에게 떠안기고 싶지 않다는 엄마는 승우가 형제들과 부대끼며 사느라 집중하지 못했을 자신의 삶을 살아내길 기대한다. "본인이 원하는 대학교 들어가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즐겁게 산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성인이 되면 독립하면 좋겠어요. 큰애와 막내는 당연히 부모로서 저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책임져야죠."
교육비 지원사업을 통해 항공정비사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승우. 사진=푸르메재단 제공
푸르메재단이 준비하는 발달장애 청년을 위한 일자리 모델인 '푸르메스마트팜'에 거는 기대도 크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하는 큰애에게도, 장애가 심해 항상 옆에 있어야 하는 어린 막내에게도 제 몫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 중의 하나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각자의 속도와 방식대로 삶의 모양을 만들어갈 아이들의 모습을 엄마는 그려본다.
글 싣는 순서 |
※이 글은 국내 발달장애 청년들의 자립에 필요한 '희망의 스마트팜' 조성을 위해 CBS와 푸르메재단이 함께 마련한 연속 기획입니다. ① '말아톤' 13년 후…고단한 삶속에 피워낸 작은 희망 ② 아이에게 한시도 눈을 못 뗀 19년…발달장애 엄마들 ③ 발달장애 청년 위한 일자리, 푸르메재단이 만듭니다 ④ 늙어가는 엄마는 점점 겁이 납니다, 아들 때문에 ⑤ "내 아이는 자기 집에서 살다가 죽으면 안 되나요?" ⑥ 35세가 되면 일터에서 밀려 집으로 쫓겨나는 그들 ⑦ 10년간 10억 기부 기업인 "행복한 삶 비결은 나눔" ⑧ [르포] 발달장애 청년들 일터로 거듭난 여주 스마트팜 ⑨ 농업을 통한 재활과 치유, 네덜란드 '케어팜'을 가다 ⑩토마토 강국 스페인 울린 네덜란드의 '신의 한수' ⑪ 네덜란드, '꽃의 나라'로만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 ⑫ 자연이 준 위안과 용서, 거칠었던 청년들을 변화시키다 ⑬ 농업과 복지의 만남...日 '사회적 농업'을 아시나요? ⑭ 치매노인·중증장애인 참여 농업…이것이 4차산업혁명 ⑮ 발달장애 아들 둔 김미화, 농부로 변신한 사연 16. 국내 치유농업 권위자 "스마트팜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17. 장애인 '수감'할 돈으로 차라리 '일자리'를 만들자 18. '꿩먹고 알먹는' 사회적농업, 국내에선 빛을 못보는 이유 19. 부활 김태원, 조용히 발달장애인 가족들 챙겨…왜? 20. 발달장애인과 스마트팜의 결합, 왜 찰떡 궁합일까? 21. 상처받은 도시인 치유하는 그곳, 환자 아닌 고객 대접 22. 비장애형제의 가려진 시간…남모를 아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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