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곡마을 송전탑. (사진=고무성 기자)
"한전이 변호사 사무실에서 송전탑 높이를 13m 낮추기로 주민 대표들과 합의서를 작성하고 공증까지 했는데 아직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어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길곡마을.
38세대가 모여 사는 이 마을에 무려 47~48m 높이의 대형 고압송전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주택 3채 뒤 50~100m가량 떨어진 송전탑은 양 갈래와 위아래로 뻗은 굵은 전선들이 흉물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송전탑은 지난 2016년 6월에 세워지면서 그 위용이 드러났다. 주민들은 착공 전 한국전력공사의 주민설명회 등 협의 과정을 통해 송전탑 높이를 32~33m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14~15m가 더 높아지자 아연실색했다.
길곡마을 주민 대표 5명은 한전과의 협의 끝에 송전탑을 주위 나무들로라도 가려서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높이를 13m 낮추기로 합의했다. 한전도 송전탑을 13m 낮춘다고 해서 주민들 건강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했다.
한전은 이와 함께 마을에 도로정비공사와 상수도 가압펌프 설치, 주거환경개선 등 1억 1천만 원의 특별지원사업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전은 지난 2017년 9월 28일 서울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송전탑 높이를 13m 낮추고 마을에 특별지원사업비를 지원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주민대표 5명과 함께 체결하고 공증까지 마쳤다. 합의서에는 한국전력공사 서울지역본부의 직인까지 찍혔다.
그런데 한전은 휴전작업을 이유로 공사를 미루기 시작했다. 지난해 3월 착공에 들어간 공사는 춘천열병합발전소의 휴전 시점(정비 기간) 조정 문제로 다시 중단돼 같은 해 10월 1일로 또 연기했다.
주민들은 다시 10월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전은 착공에 앞서 8월 끝내 주민들에게 약속한 마을 특별지원사업비 외에 송전탑 높이를 낮추는 공사를 이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민들은 국민권익위원회와 한전 등에 합의서대로 이행해 줄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도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근 주택에서 촬영한 송전탑. (사진=마을 주민 제공)
60대 주민 A 씨는 "우리가 현재 원하는 것은 한전이 약속한 합의서에 따라 이 흉물스러운 송전탑을 차라리 보이지 않도록 높이를 낮춰주는 것뿐"이라며 "개인 보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70대 주민 B 씨는 "이제는 송전탑만 쳐다보면 가슴이 막 떨리고 울렁거린다"면서 "소송도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니다 보니 농촌 주민들이 안 하려고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송전탑이 들어선 뒤 인근 집값이 크게 떨어졌다"며 "주민들은 집을 헐값에 팔고 마을을 떠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전은 당연히 주민 대표들과의 합의서에 따라 송전탑 높이를 낮춰야 하지만, 이행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공기업으로서 주민들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감사에서 지적을 받아 어려운 상황"이라며 "송전탑 축소 공사는 현재 어렵지만, 축소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마을에 추가로 지원하는 대안으로 주민들과 3개월 동안 협의했지만 거부당했다"고 해명했다.
송전탑이 주민들과의 애초 협의와 달리 높아진 이유에 대해서는 "합의를 담당하는 부서와 송전탑을 세우는 부서가 다르다 보니 주민들의 요구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며 "송전탑을 인명과 안전에 문제없게끔 세우다 보니 애초 주민들의 요구보다 조금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전과 길곡마을 주민 대표 5명 간의 합의서를 공증한 변호사 사무소 관계자는 "한전이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주민들은 합의서를 토대로 고소할 수 있다"면서 "공증까지 마친 합의서는 1심 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