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껍데기에 산란일자 표기 의무화를 하루 앞둔 22일 경기도 포천 한 달걀집하장에서 직원들이 검수작업을 하고 있다. 황진환기자
양계농가와 계란 유통회사들이 '계란 껍질에 산란일을 찍지 않겠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난각표기에 산란일까지 추가하는 계란유통정책이 표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책에 대한 반대가 심한데다 6개월의 유예기간까지 둬서 제도시행 초기 '산란일 표기비율'은 10%안팎에 그치고 소비자 혼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 "산란일 신경도 안쓴다는 농가가 80~90%""계란 생산.유통업자가 (뭔가를) 감추기 위해 안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할 수가 없습니다. (산란일 표기에) 우리는 신경도 안쓴다는 생산자가 80~90%는 될 거예요. 그리고 산란일을 찍는다고 크고 작은 마트에서 다 받아줄 수도 없어요 수용에 한계가 있습니다"
"계란 산란일 표기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계란 생산량은 동일한데 일정기간내 유통량은 감소하는 것이고 그러면 버려야할 계란이 늘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계란 생산.유통 종사자들의 우려다.
지난 23일부터 계란 껍질에 산란일을 표기하는 제도가 시행됐지만 다수 농가가 산란일을 찍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유는 뭘까? 산란일을 찍을 경우 매일 재고로 남는 계란을 합법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길이 막혀 농가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양계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양계농가는 1일 4000만개 이상의 계란을 생산하고 이 가운데 10%내외인 400여만개가 재고로 남아 몇일 시차를 두고 시장에 유통된다. 산란일이 표기되면서 이 재고란의 처분방법이 묘연해진 것. 공급과잉으로 밀리고 밀린 재고란은 최악의 경우 폐기 처분되거나 시장에 덤핑으로 공급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곧바로 수입 감소로 이어진다.
양계농장과 집하장을 운영하는 이동길씨(경기 포천시)는 22일 CBS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래된 계란을 안 받으려 하니까 계란이 생산현장에 모이게 되고 덤핑으로 빼야된다. 이로인한 피해액은 50%에 이를 걸로 추정한다"고 주장했다.
양계업계에서는 이마트나 롯데마트 등 대기업과 거래를 하는 농가는 계란을 팔기 위해서라도 산란일을 찍지만 중소형마트에 납품하는 농가는 산란일을 찍지 않은채 계란을 납품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마트 관계자는 CBS와 가진 통화에서 "대기업 입장에서는 법과 규정을 준수할 수 밖에 없어 100% 산란일이 찍힌 계란만 납품받고 있다"고 밝혔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이 1일 계란유통량의 30%가량 담당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시중에 유통중인 계란의 상당수는 산란일이 찍히지 않은 채 유통되는 것으로 업계도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양계농가만 탓할 일은 아니다. 농가와 업계의 손익이 걸린 문제인데다 정부가 반발 농가를 의식해 6개월의 유예기간까지 허용해 줬지만 이 또한 산란일 표기율이 떨어지는 원인이 됐다. 유예기간을 둔 이유는 규정을 위반한 경우라도 행정처분을 면제해주면서 농가에 준비기간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농가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6개월만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준비할 수도 없고 준비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 농가의 입장이다.
달걀 껍데기에 산란일자 표기 의무화를 하루 앞둔 22일 경기도 포천 한 달걀집하장에서 달걀에 산란일자를 표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황진환기자
◇ "6개월만에 해결될 문제 아니다" 근본대책 촉구농장대표 이동길씨는 "6개월 더 준다고 해도 산란일자 찍는 것을 똑같이 못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고 유통구조가 바뀔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도)몇개월 전부터 산란일자를 찍으면 생산판매가 위축되고 산업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했다. 차라리 이번에 전면 시행해 버렸으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됐을텐데.. 답이 없다"고 말했다.
유통업계 시각도 마찬가지. B대형마트 관계자는 "제도가 실효성이 있으려면 생산된 계란에 대해 100% 관리가 돼야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뿐아니라 제도 자체가 계란유통의 근원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어 제도를 위한 제도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유통업계에서는 1월1일부터는 계란의 냉장보관이 의무화된 상황이고 냉장보관시 장기보관해도 안전에 별 문제가 없을 뿐아니라 외국에서도 산란일 표기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없다는 점을 들며 정부정책에 무리가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계란유통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포인트는 농가의 계란공급이 늘 과잉상태라는 점이지만 산란일 표기 제도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
"계란유통은 계란이 없으면(달리면) 거의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고 보통은 동절기 1주일치, 하절기 3-4일치 재고를 차고 간다" 우리나라 계란유통의 불안정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로 유통업계에서 회자된다.
당국에서는 산란일을 표기함으로써 안전은 물론 전염병 등으로 계란품귀현상이 빚어질 때 이득을 취하는 일부 기회주의적 행태까지 바로잡겠다고 하지만 모든 농민들이 재고란을 악용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달걀 껍데기에 산란일자 표기 의무화를 하루 앞둔 22일 경기도 포천 한 달걀집하장에서 한 직원이 쌓여있는 달걀을 보여주고 있다. 황진환기자
◇ '계란파동에 초과공급 용인'.. 농가만 탓할 수 없어어떻게 보면 정부에서도 'AI다 살충제 파동이다' 해서 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계란수급에 비상이 걸렸던 만큼 일정한 초과공급을 용인해온 측면이 있고 농가는 이에 익숙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경기도의 한 계란집하장에 근무하는 김 모씨는 "정부가 농가경쟁력을 높인다며 저리자금을 많이 지원하고 농가가 이를 경쟁적으로 가져다 쓴게 계란초과공급의 주요 원인이 됐다"며 "자금 지원 당시 10억원을 신청하면 5억원은 지원, 3억원은 1~2%대 장기융자, 자부담은 2억원에 불과한 땅짚고 헤엄치기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현실을 도외시한채 식약처가 소비자 측면만을 고려해 단기간에 제도 전환을 꾀하고 나섰으니 양계업계가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축산당국에서는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케이지당 사육마리 수를 제한하는 정책'도 입안했지만 농가에서는 오히려 '총 사육면적 늘리기'로 맞서며 기존 생산량 유지를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라 보다 치밀한 접근없이는 생산량 감소가 어렵다.
생산량 조절에 대한 명확한 해법없이 추진된 산란일 정책은 애초부터 혼선이 우려됐다. 돈 빌려 생산량 늘려놨더니 계란값이 떨어지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산란일 정책까지 밀어닥치자 사정이 어려운 농가들은 패닉상태다.
양계농가가 지난 70일간 농성을 이어가며 반발을 누그러트리지 않자 식약처는 지난 20일 또다시 양계농가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조치'라는 유인책을 내놨다. 그리고 가까스로 산란일 정책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당장 손해를 감수해야할 농민들이 산란일 표기에 얼마나 동참해 줄 지는 미지수다. 산란일 정책이 계란수급 문제와 보조를 맞추지 못한데다 농민반발에 대한 여권내 우려까지 커져 자칫 산란일 표기가 흐지부지되는 것 아니냐는 일부 관측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