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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너머 하나로'…임시정부에 뭉친 독립군

사회 일반

    '갈등 너머 하나로'…임시정부에 뭉친 독립군

    [광복군의 함성⑤] 각지 독립군들, 광복군으로
    30여명에 불과했던 광복군, 무장조직들 흡수
    좌익 계열 김원봉, 임시정부 군무부장 맡아
    일본군 탈출한 학도병들도 속속 합류

    1920~30년대 각자의 생각과 이념에 따라 중국 대륙에서 따로 활동하던 독립군 상당수는 결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아래 한 깃발로 뭉쳤다.

    ◇ "국군에 군사역량 집중하자"

    약산 김원봉 선생이 살던 대불단정가 172호 건물(사진=김형준 기자)

     

    중국 충칭시(重庆市) 남안구(南岸区) 탄자석(弹子石) 대불단정가(大佛段正街) 172호.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 1지대로 합류한 약산 김원봉이 살던 곳은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건물 1층에 자리한 가게는 셔터가 굳게 닫혀 있었고 표지석 따위는 볼 수 없었다. 대불단을 둘러싼 주변은 대규모 주택단지 재개발이 한창이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을 지낸 이선자씨와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이씨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근처 건물에 많이 모여 살았는데, 호적을 보면 40~50명이 같은 주소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며 "조선의용대는 이곳에서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는 등 홍보 활동에도 활발했다"고 설명했다.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을 지낸 이선자씨와 함께 대불단 주변을 둘러보는 CBS노컷뉴스 취재진(사진=김형준 기자)

     

    1940년 창설 당시 한국광복군 병력은 고작 본부 요원 정도 꾸릴 수 있는 30여명 규모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 세력을 규합해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독립기념관이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등에 따르면 다음해 1월 한 번에 100여명의 병력이 보충됐다. 무정부주의 성향 무장조직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5지대로 흡수된 것이다.

    전지공작대 측은 "국군인 광복군에 군사역량을 집중해 이를 발전시켜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류 이유를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 사료조사실장은 "임시정부가 전지공작대장 나월환과 대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여 설득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 좌우갈등 넘어 임시정부로

    1941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합류해 편성된 5지대(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창설돼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어 1942년에는 김원봉이 좌익 성향의 조선의용대 본대 약 50여명을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1938년 창설돼 주로 선전공작과 정보수집활동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 80% 이상의 병력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화북으로 이동했고 본대만 충칭에 남은 상황이었다.

    합류 이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가 합류한 광복군 1지대의 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을 겸임했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군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임정과 조선의용대는 좌우 이념대립으로 한때 갈등을 겪었지만 일제라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생활했던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그 사람들(조선의용대)은 좌익이고 우리(임시정부)는 보수적이었지만 모두 일본과 싸우기 때문에 서로 협조할지언정 싸우지는 않았다"고 기억했다.

    김 회장은 "연안으로 갔던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이 베이징 근처 일본 점령지에서 각각 비밀 지하 공장을 운영한 적도 있다"며 "오다가다 서로에 대해 자연히 알게 되면 모른 척했지, 절대로 해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목숨 건 적지 모병활동

    한국광복군훈련반을 졸업하고 현지에 남은 故김우전 지사가 지난 1월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만나 인터뷰하는 모습. 김 지사는 지난달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김형준 기자)

     

    광복군은 적지에 직접 들어가 거점을 만들고 모병 활동을 하는 이른바 '초모공작'에 힘을 쏟았다.

    당시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광복군 소속 여군이었던 故지복영 지사도 이 초모공작에 자원했다. 지 지사의 아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어머니가 했던 활동은 적지에서 일본군에게 잡히면 바로 처형될 수 있는,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활동이었다"고 말했다.

    광복군 징모 제6분처의 지휘자였던 김학규 장군과 그의 부인 오광심 여사, 서파 대원. 세 사람 모두 초모공작에 투입됐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기념관이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등을 보면, 지복영 지사가 참여했던 징모 제6분처 초모공작의 지휘자였던 김학규 장군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가 있던 안후이성(安徽省) 린취안(临泉)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했다.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희망하는 임무에 따라 광복군에 배치됐다. 졸업생들 중 대부분은 충칭으로 가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 시안의 2지대 등에 배속됐다. 일부는 현지에 남아 교육훈련을 맡거나 적지에 나가 다시금 지하공작을 벌였다.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에 따르면, 1945년 3월 말까지 초모공작에 의해 모집된 인원은 339명에 달했다. 이 중 제6분처에서 모집된 인원만 160여명으로 거의 절반에 달했다.

    한국광복군훈련반 1기 졸업생들(사진=독립기념관 제공)

     

    ◇ "임시정부 있어 합류 꿈꿨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노력이 빛을 본 건 일제 말기쯤이었다. 여러 무장조직들이 합류한데다 초모공작의 성과로 광복군의 규모도 대폭 증가한 것이다.

    1944년 12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한 김영관 지사는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중학생 시절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곳으로 탈출해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광복군에는 일본군 출신, 청년단, 현지 교민들과 유학생 등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혼합돼 있었다"며 "만약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그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지 않았겠나"고 말했다.

    국사편찬위 김광재 사료조사실장은 "광복군은 의병, 대한제국군,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여러 무장단체들의 통합을 강조했다"며 "무장력을 갖춘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지위를 공고히 했고, 그 결과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감수를 받았습니다.

    글 싣는 순서
    ※ 총을 들었고, 정세를 읽었다. 임시정부에 모인 선열들은 목숨을 내걸고 자주독립을 그렸다. 주권회복 과정이 일제 패망이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CBS노컷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충칭과 시안을 찾아 광복군의 피와 땀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② 대륙을 흔든 독립운동, '광복군 오페라' 아리랑
    ③ 중국에 '독립 노력' 약속 받아낸 터, 최초 확인
    ④ "여기는 충칭, 동포들 듣고있나"…임시정부 라디오방송
    ⑤ '갈등 너머 하나로'…임시정부에 뭉친 독립군
    ⑥ 여의도 착륙한 광복군, 일본군에 포위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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