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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수많은 독립운동가 배출한 상동교회


    옛 상동교회 전경.

     


    [앵커]
    CBS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 대표 16인을 한 명 한 명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에는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교회들을 돌아보는 기획보도를 준비했는데요.

    먼저,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며 항일민족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던 상동교회를 소개합니다. 오요셉 기자입니다.

    [기자]
    1888년, 스크랜턴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상동교회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상동교회는 매일 구국기도회를 열어 조약 무효 상소운동과 을사오적 처단운동을 벌였습니다.

    또, 비밀 항일결사단체인 신민회의 결성과 헤이그 특사파견 등 국권회복을 위한 중요한 민족운동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고종황제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이준 열사는 상동교회의 청년회장이었으며, 이 외에도 이회영, 김구, 안창호, 신채호, 주시경 선생 등 수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상동교회를 거쳤습니다.

    일반 역사학계에서도 이들을 가리켜 '상동파'라 부를 정도로 민족운동사에서 상동교회의 역할과 영향력은 큽니다.

    [인터뷰] 김종설 권사 / 상동교회 민족교회연구소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다 이리로 몰려들었죠.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중심이 바로 이곳이었죠. 그래서 이곳에서 그 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역사학계에서는 상동파라고 부르죠."

    상동교회가 이처럼 민족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전덕기 목사가 있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전덕기 목사는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청년들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들에게 독립정신을 함양시켰습니다.

    [인터뷰] 조선혜 박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상동청년학원을) 운영하면서 그 당시에 젊은이들에게 어린 소년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이제 기독교 신앙 안에서 민족주의를 함양시켰죠."

    전 목사는 1914년, 105인 사건으로 인한 고문 후유증으로 소천했지만, 그의 신앙 정신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이필주, 최성모, 신석구, 오화영 목사가 모두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받은 상동교회 출신입니다.

    [인터뷰] 김종설 권사 / 상동교회 민족교회연구소
    "(신앙으로)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그 공동체는 보다 크게 변화의 힘을, 역동성을 갖는 거죠. 그래서 사회가 변화고 나라가 변한다(는 거죠). 결국은 그렇게 상동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돼서 행동하는 기독교인이 된 거죠. 소위 요즘 이야기하는 실천신앙..."

    실천하는 신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항일 우국지사들의 집합소의 역할을 감당했던 상동교회.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할과 방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합니다.

    CBS뉴스 오요셉입니다.

    [영상촬영 최내호] [영상편집 전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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