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북미 협상 국면에서 유연한 목소리를 내 왔던 '협상파' 스티브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미국은 북한의 점진적인 비핵화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실상의 강경 발언을 내놓으면서 향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괄타결식'으로 선회했음을 시사했다.
비건 대표는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카네기국제평화기금 주최 국제핵정책 콘퍼런스의 좌담회에 참석해 "북한과의 외교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밝혔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미협상을 직접 담당해 온 비건 특별대표가 공식석상에서 처음 입을 뗌으로서, 하노이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 노선을 밝힌 것이다.
대화의 판은 깨지 않겠지만, 그간 시사해 온 '단계·동시적 해법'에서 사실상 '일괄타결식'에 무게를 두겠다는 메시지다.
비건 대표는 앞서 지난 1월 스탠포드대에서 가진 연설에서 단계적 비핵화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며 양국과의 신뢰 구축과 함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병행적인 진전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역시 "비건 특별대표가 강조한 대로 우리는 동시적이고 병행적인 진전을 추구하고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이를 두고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완화' 입장이 완고하던 미국이 사실상 단계·동시적으로 선회했다며 협상 결과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졌었다.
그러나 비건 대표는 이날 "미 행정부는 단계적 비핵화를 염두에 둔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하노이에서 회담이 결렬되고 나서 볼턴의 목소리가 부각되다가 비건 대표가 입장을 바꾼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단기적 합의를 먼저하면 국내 정치적으로도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시간이 미국 편이며 강경한 대응이 북한과의 협상에 더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노이 정상회담 당시 북미 정상 (사진=연합뉴스)
외교가에서는 미국이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에 비핵화의 개념과 향후 로드맵을 확실하게 제시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를 북한이 받아들이기 전에는 세부 논의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왔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실적으로 '한 날 한 시'에 핵을 모두 없앨 수는 없지만 최종적인 목표에 대한 분명한 계획과 약속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소한 북한이 원하는 영변, 영변+ α , 핵무기 등을 따로 떼어 단계별로 합의 및 이행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뜻임은 분명하다.
이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은 쉽게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미 수차례 실무회담과 하노이에서 최종 입장을 통보, 결렬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하노이 회담 이후 침묵을 깨고, "두 나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밝힌 것 역시,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비핵화는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재차 밝힌 것은 제재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북한의 절박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에게는 승기를 잡았다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의 잇딴 강경발언에 이어 비건 대표까지 이같은 입장을 밝히면서, 일각에서는 북미 간 강대강 대치가 더욱 심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실행하며 상응조치를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하는 이상, 대승적으로 비핵화 로드맵을 내놓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아슬아슬한 대치 끝에 결국 대화로 연결될 것이라는데는 이견이 크게 없다. 하노이 회담 이후에도 북미 양측 모두 대화를 이어갈 의지를 지속적으로 분명히 밝혀왔기 때문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늦어도 올해 하반기에는 대화가 재개될 수밖에 없다"며 "미국도 국내외 정치적 상황 상 대화의 판을 깰 수 없고, 북한 역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대화를 단절하는 것은 북미 모두에 부담이다.
비건 대표가 이날 좌담회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됐으나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는 지속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 것 역시, 미국이 요구한 방식의 좀 더 진전된 안을 가져와 만나자는 메시지를 북한에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읽힌다.
또다른 외교소식통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특사를 보내든 판문점에서 만남을 갖든 적극적으로 북한을 설득하는 등 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단계를 최대한 쪼개지 않는 방향으로 합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