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뉴스데스크' 2019년 3월 18일 방송. (사진='뉴스데스크' 화면캡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볼게요. 윤지오씨가 검찰 진상조사단에 나가서, 처음 나갔을 때는 말씀 안 하셨다가 이번에 말씀하셨잖아요, 이 명단을. 그렇게 말하는 것과 지금 이렇게 생방송으로 진행 중인 뉴스에서 이분들('장자연 리스트' 속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윤지오씨가 용기를 내서 장자연씨 죽음에 대해서 좀 더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이런 생방송 뉴스 시간에 이름을 밝히는 게 오히려 더 진실을 밝히는 데 더 빠른 걸음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보셨어요?"(MBC '뉴스데스크' 왕종명 앵커)
MBC 메인뉴스 '뉴스데스크' 앵커가 '고(故) 장자연 사건'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공개 증언에 나선 윤지오씨에게 '장자연 리스트' 속 실명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장자연씨를 위해서, '더 빨리'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실명을 공개하라고 했다. 묻고 싶다. 과연 언론이, 그것도 공영방송이 증인인 동시에 피해자인 윤지오씨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었을까.
MBC '뉴스데스크'는 지난 18일 윤지오씨를 스튜디오로 초대해 생방송 인터뷰를 진행했다. 앞서 윤씨는 지난 12일 대검찰청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 참고인 조사를 마쳤다. 이날 윤씨는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관해 언론인 3명과 정치인 1명의 이름을 진술했다.
윤씨에게 왕종명 앵커는 거듭 윤씨가 검찰과 경찰에 진술한 '장자연 리스트' 속 인물의 실명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윤씨가 거듭 거부했음에도 말이다. 계속된 거부에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는 질문까지 나왔다. 인터뷰를 지켜본 시청자들 역시 압박 같은 질문에 무례함을 느꼈다.
윤씨는 "제가 발설하면 책임져 주실 수 있나요"라고 반문하며 "이 부분(실명 공개)에 대해서는 검찰, 경찰이 밝혀내야 하는 부분이고, (검경이) 공표를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윤씨 말대로 리스트 속 가해자들의 죄를 밝히고 단죄할 책임이 있는 곳은 수사기관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질문이 향해야 할 곳이 피해자를 향했다.
윤씨는 지난 10년간 13차례에 걸쳐 고 장자연씨 사건에 대해 증언한 인물이다. 2009년 장자연씨의 죽음 이후 수사기관이 외면하고 언론이 침묵한 시간을 홀로 증언하며 버텨왔다.
심지어 윤씨는 단순한 '증인'이 아니다. 증인인 동시에 거대 언론·경제·정치 권력이 얽혀 있는 '장자연 사건'의 '피해자'이다. 10년을 일관되게 증언해 온 윤씨에게 MBC는 '더 빨리' 진실을 밝히기 위해 '더 빠른 걸음'으로 걸으라고 채근했다. 언론에 미행당하며 위협받는 속에서 힘겹게 얼굴을 공개한 증인이자 피해자에게 더 용기 내라고 압박한 것이다.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열린 검찰 과거사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및 고 장자연 씨 사건 진상 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배우 윤지오씨가 발언을 마치고 울먹이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만든 '성폭력·성희롱 사건 보도 공감 기준 및 실천 요강'에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 있다.
해당 요강은 '피해자 보호 우선하기'라는 항목을 두고 "언론은 피해자의 권리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피해자 보호에 적합한 보도방식을 고민하여야 한다"며 "성폭력은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으로 상대적으로 약한 지위에 있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임을 감안하여,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사실 확인 등 형식적인 객관주의를 경계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로 보도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취재 시 주의사항' 항목에서는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먼저 밝히고, 사전 동의를 구하고 인터뷰를 실시하되, 보도를 전제로 하는 경우 보도 이후 예상되는 2차 피해 등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다", "피해자에게 사건 발생의 책임을 떠넘기거나 입증책임을 지우는 질문을 삼간다" 등을 강조하고 있다.
윤씨는 이미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수차례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또한 '장자연 리스트' 실명 언급을 할 경우 명예훼손으로 가해자들에게 역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며, 실명 공개 요구를 자제해 줄 것을 거듭 부탁했다. 공개 증언 이후 위협을 느끼는 윤씨를 위해 국민들은 윤씨의 신변 보호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을 올리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스데스크' 왕종명 앵커의 질문은 질문 의도나 선의여부와 상관 없이 실명 공개가 가져올 파장과 윤씨에 대한 2차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비친다. 또한 피해자에게 사건 발생의 책임을 떠넘기거나 입증책임을 지우는 질문을 삼가야 함에도, 빠르게 진실을 밝히게 용기 내라는 것은 피해자인 윤씨에게 사건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과도 같다.
2009년 장자연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장자연 리스트' 속 언론·경제·정치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장씨의 죽음을 10년 동안 의혹으로만 남긴 건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외면이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를 외면할 수 있었던 데는 수사기관을 향해야 할 감시가 소홀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침묵 속에 모든 것이 묻혔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에 얽힌 의혹을 '더 빨리' 밝히지 못하고 10년이란 시간 뒤로 끌고 온 건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오히려 더 진실을 밝히는 데 더 빠른 걸음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보셨어요"라는 질문은 누구에게 던져야 할 질문일까.
MBC '뉴스데스크'는 지난 17일 "30분 먼저 시작해 이슈를 선점하고 85분간 관점과 깊이가 있는 보도로 알차게 채운 뉴스가 되게 만들 것"이라며 85분 확대 편성을 시작했다. 이날 클로징 멘트에서 앵커는 시청자에게 "30분 일찍 찾아뵌 새로워진 뉴스데스크, 여러분 어떻게 보셨나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모쪼록 많은 관심과 질책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깊이 있는 뉴스를 위해 확대 편성했다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윤지오씨 인터뷰에 대한 시청자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MBC가 허투루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과연 언론의 진정한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바란다.
※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 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