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우상' 련화 역을 맡은 배우 천우희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성에 차진 않죠, 당연히."
영화 '우상'(감독 이수진)에서 본인 연기를 어떻게 봤냐고 하니 돌아온 대답이다. 지난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천우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영화 '한공주'(2014)로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스스로 증명한 천우희에게 '한공주' 이수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에 출연하는 건 그 의미가 남달랐다. '저, 잘 컸죠?' 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
인터뷰 후반부에 뜻하던 대로 '잘 큰 것'을 보여준 것 같냐고 질문했을 때도, 천우희는 대번에 "아니"라고 말했다. 자기 몫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돌아보면 아쉬움이 짙다는 설명이다. 영화 외적인 일로 크게 상심한 날이 있었고, 그래서 작품에 충분히 몰입할 수 없어 아쉬웠다고.
하지만 그의 인터뷰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었다. 연기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연기'를 가장 좋아하고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고 진솔하게 털어놓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음'이.
◇ 천우희가 소개한 '우상'의 관전 포인트'우상'은 아들의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은 자(구명회 역, 한석규), 목숨 같은 아들의 죽음을 맞닥뜨린 자(유중식 역, 설경구) 사건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자(련화 역, 천우희)의 이야기를 그렸다.
존재감이 몹시 뚜렷한 역할인데도, 천우희의 연기는 과잉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감정을 많이 참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천우희는 "감정 표출이 많이 된 씬이 있었는데 다른 관계자분들, 스태프분들은 훌륭하다고 했는데 감독님은 그 테이크를 다 안 썼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왜 그 장면을 쓰지 않았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한공주'를 경험하며 이 감독의 스타일을 어렴풋이 이해한 것 같다고 부연했다. "배우가 인내해서 (감정이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것을 좋아하신다고 해야 하나, 그랬던 것 같다."
이야기는 풀릴 듯 풀릴 듯 풀리지 않는다. 지난 7일 언론 시사회 때 '너무 이야기를 꼬았다'는 평이 일부에서 나온 이유다. 천우희도 "편하게, 쉽게 표현하려고 만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영화 보고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기기 위해 썼던 트릭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지만 그게 감독님이 원하는 부분이지 않을까"라고 바라봤다.
그는 "선입견으로 '어렵다', '난해하다'는 생각을 갖고 보면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워질 것 같다. 의미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그냥 흐름에 맡기고 보시면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의도를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천우희는 연변 사투리의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반응에 "사투리를 못 알아듣겠다는 말에 약간 소심해졌다. 선생님한테는 엄청 칭찬받았기 때문"이라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영화에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만큼, 각색하기보다는 실제 쓰는 표현을 살리려고 노력했단다. 천우희는 "너무 갔나? 너무 리얼리티만 추구했나? 싶지만 저로서는 만족감이 있다"고 밝혔다.
◇ 가볍고 단순하고 말랑말랑한 것도 하고 싶어
천우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한공주'와 '곡성' (사진=각 배급사 제공)
'한공주', '곡성' 등 대표작의 영향 때문인지 천우희는 센 캐릭터를 주로 해 온 이미지가 있다. 사람을 극한으로 모는 설정의 영화에 자주 나온 것 같다는 말에 천우희는 "'나한테 원하는 건 다 이런 것들인가?' 했다"며 웃었다.
이어, "저는 캐릭터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연히 (연달아) 강한 역할을 하니 눈에 띄는 것 같은데 이야기 전체가 흥미롭고,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걸 내가 분명히 느낄 수 있다면 선택하는 거다. 아주 가볍고 단순하고 말랑말랑한 것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분명한 취향은 없지만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정통 멜로 생각은 없냐는 질문에 "해 보고 싶다. 제발 좀 (대본을) 많이 주셨으면 좋겠다"라면서도 좋아하는 멜로 작품을 들어달라고 하니 "지금 딱히 생각나는 건 또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취향이 티가 나나?"라고 해 폭소가 터졌다.
천우희는 "아직 안 해 본 게 너무 많다 보니까 어떤 캐릭터나 장르를 해 보고 싶다기보다는 안 해 본 걸 많이 도전해 보고 싶다"고 전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작품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다. 그는 "너무 좋더라. 연기도 너무 좋고. 저런 역할 한 번 해 보고 싶다. 영화 보면 '아, 저것도 해 보고 싶다!' 한다"며 "제가 못 해 봤기 때문에 남의 것이 탐나 보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 연기에 '제일 욕심이 많은' 배우 천우희아끼던 선배를 잃었을 때, 모든 걸 바쳐 연기해 온 자기 자신조차 허무하게 느껴졌다는 천우희는 이제 일상을 회복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연기에 가장 욕심이 크다.
"연기 욕심 엄청 크죠. 제일 많죠. 제가 되게 친한 친구한테 그런 적이 있어요. 엄청 화려하고 예쁜 분들을 보면서 부러웠어요.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행복하고 유명세와 부를 누리고 있는데 나는 뭘까? 했죠. 그랬더니 친구가 '저런 삶도 나쁘지 않지만 바꿔서 살면 네가 원할 것 같아?' 했어요. 아닐 것 같더라고요. 그 나름의 괴로움이 있겠죠? 결국 저는 배우고 연기 자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연기'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우상'에서 자기 연기가 아쉽다고 말한 것도, 본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기 때문일 것이다. '잘 컸다'는 걸 보여줬냐고 묻자 "아니다. 아쉽다. 현장에서 잘하고 싶었는데 제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약간 몰입하기 힘든 순간이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그 씬은 없는 것이지 않나. 내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배우 천우희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이수진 감독은 괜찮다고 했지만 천우희는 성에 차지 않았다. 모든 연기에 '만족'은 없다지만 '우상'이 특히 아쉬웠던 이유다. 더구나 팬이자, 관객으로 기다린 이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라 아쉬움이 더 크다고.
그래도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지는 않을 생각이다. 단역부터 시작한 만큼 한 단계씩 오르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천우희는 어느새 그게 자신을 옥죄고 있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곡성' 때 '나도 영어 배우고 열심히 해 봐야겠다' 했어요. 근데 일단 영어 공부를 아직 안 하고 있고요. (웃음) 저 스스로 압박을 느꼈달까요. 여기서 영화 찍고 상 타고 칸(영화제)에 가면 그럼 해외 진출도 한 번? 그게 저를 스스로 옥죈다고 해야 할까요? 근데 그 방식을 좀 좋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주 단역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단계 단계를 밟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노력하면 이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컸고요. 이 작품은 전 작품보다 더 성장하길 바라고, 더 나아지길 바라며 몰아붙였거든요. 주변에서 바람도 있었고 저도 그런 게 꿈이었나봐요. 좀 더 잘 돼서 더 큰 시장에 나가는 것. 근데 그런 게 저한테 독처럼 올 때가 있었어요. 결국 배우로서의 인지도, 인기와 상품성에 의해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딱 오더라고요. 상처받기도 했고요. 내가 노력해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아닌 부분이 있다는 걸 저 스스로가 느끼니까. 할리우드 진출을 못한 게 죄거나 잘못은 아니잖아요? (웃음) '아, 왜 나는 노력을 못 하지?', '영어 공부를 못 하지?', '왜 다음 것들을 못 하지?' 생각했는데 원한다면 10년 뒤엔 할 수도 있겠지, 언젠간 하겠지 하고 마음을 놓게 됐어요."
◇ 차기작은 '버티고'와 드라마 '멜로가 체질'천우희는 영화 '버티고'와 드라마 '멜로가 체질'로 관객과 시청자를 만날 예정이다. '버티고'에서는 고층 건물 사무실 안에서 추락의 공포를 느끼는 여자 역을 맡았다.
천우희는 "'버티고'는 제가 한 작품 중에 가장 자기 감상적이고 가장 자기 위안적인 작품인 것 같다. 작품 보는 순간 되게 많이 울었다. 그래도 '아, 내가 다시 연기를 해 봐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준 고마운 작품"이라고 밝혔다.
이어, "혼자만 심취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부끄러워했다"며 "그걸 되게 경계했는데, '버티고' 때는 부끄럽거나 두려운 걸 떨쳐버리고 그냥 이기적으로 연기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사람들이 '뭐야~ 처량맞아'라고 할지언정 한번 해 봐야겠다 그렇게 연기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르곤'(2017) 이후 2년 만에 드라마로도 복귀한다. 1600만 관객을 모으며 크게 흥행한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준비 중인 JTBC '멜로가 체질'이다.
오늘(20일) 개봉한 영화 '우상'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천우희는 "'멜로가 체질'은 다른 방식의 작업일 것 같다. 저는 작품을 할 때마다 방법을 조금 바꿔보는 편이다. 같이 하는 감독님, 배우들, 현장에 따라 정말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으니까 되게 유연하게 있으려고 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이번에는 캐릭터를 애써 만든다기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우희는 "감독님이 가진 색깔, 지금까지 추구해 온 개그 코드가 있으니 분석한다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천우희의 가장 큰 행복은 역시 '우상'의 개봉이다. 그는 "뭐랄까, 양가적인 감정이긴 한데 그럴 때가 있다. 영화 개봉할 때까지 마음 한 구석에 그 인물을 갖고 있다가, '아, 이제는 털어버릴 수 있겠다' 하는 거다. '이제 정말 내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울적함도 들고. 빨리 '우상' 개봉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밝혔다. <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