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민국'으로 향하는 첫 단추를 꿴 이들은 가난과 생존의 공포, 분열 안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며 험준한 역사에 정면으로 맞섰다. 바로 그 안에 소리없이 헌신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CBS노컷뉴스는 흔적없이 산화한 수많은 '무명'으로 채워진 임시정부 27년 역사를 재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상해 외탄 거리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이 엄중하고 암흑과도 같은 시기를 견디라는 일종의 위로였을까? 1911년 4월 11일 상해 김신부로 거리엔 벚꽃이 만개했다. 임시의정원 창립식을 지켜보던 무명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 잠시 넋을 잃고 몽상에 빠져들었다.
1919년 3월. 상해의 한 찻집. 후줄근한 행색의 두 사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지금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에는 2000만 우리 동포가 참여해 폭발적인 열기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영향으로 지금 이 곳 상해로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면 일제에 대항할 정부를 영영 만들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무명은 제법 힘주어 조소앙에게 말했다. 조소앙도 지금이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는 적기라는 걸 공감한 듯 무명에게 화답했다.
"일단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한 독립임시사무소는 건립이 된 상황이니 우리 조금 더 힘을 가지고 노력을 해봅시다. 무명군은 우리 동포가 일제에 용기 있게 대항한 3.1운동을 외신에 고발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짧고 나직이 대답한 무명은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의 독립임시사무소로 향했다.
당초 무명은 연해주에서 일제에 대항할 방법을 모색하며 활동했지만 마땅치 않았고,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후 각 요인들이 임시정부 건립을 위해 상해로 모인다는 것을 듣고 즉시 상해로 들어왔다.
무명은 일제의 폭정에 신음하던 한국의 동포들이 처음으로 결기를 보여줬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자긍심을 느꼈다.
3.1 운동이 일어난 시기인 1910년대는 제국주의 질서가 재편되고 약소민족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격화된 시기였다.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등을 통해 국제적 역학 관계가 재정립되고,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으로 봉건적 질서가 붕괴되는 등 세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8일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고 이 원칙은 독일등 패전국이 보유했던 식민지의 독립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국제주의의 분위기에 편승해 내심 독립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을 향해 가해지는 일제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각종 식민지 악법을 통해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후 한국 국민들의 민심이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고종은 당시 한국 사람들에겐 동정의 대상임과 동시에 일제의 폭거로부터 보호해야하는 마지막 자긍심이었다. 망한 국가의 국왕이였지만, 사망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는 국민들의 슬픔은 그야말로 살을 애어내는 슬픔과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일제가 한국민들의 분열시키기 위해 고종을 독살 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퍼지자 국내 반일감정은 폭발직전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과거부터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천도교, 대종교등 종교계는 이를 계기로 직접적 연대를 시작했다.
또한 민족대표로 선출된 33인등이 3.1 운동에서 발표할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고 3.1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거사의 당일인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중 29명(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제외)이 오후 2시 기생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열고 있다고 연락하게 했고, 전화를 받은 일본 경찰 80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쳤다.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삼창 후에 일본 경찰에 연행됐다.
3.1운동 당시 거리를 활보하며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
3.1 운동을 계획했던 주요인사는 하루만에 체포됐지만 3.1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월~4월 사이 총 200만여명이 만세 운동에 참석했고 수천 회의 크고 작은 만세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들끓었다.
이후 일본은 기존 강경 일변도의 통치정책에서 일종의 유화 통치인 '문화통치'로 기조를 변경하게 된다.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에 대한 열망으로 일어난 3.1 운동의 정신이 1919년 4월을 만든 이유가 된 것은 물론, 일제의 통치정책까지 변화하게 만든 것이다.
이후 1919년 4월 8일 서울에서 강대현은 임시정부 초안을 가지고 왔고, 4월 10일과 11일에는 전국을 대표하는 29명의 의원이 출석하여 '임시의정원'이라는 의회를 구성하고 이동녕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비록 국내외 요인들을 하나로 모아 수립된 임시정부는 아니었지만 3.1운동에서 들끓었던 공화정의 열기를 그대로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틀림없었다.
임시의정원 수립식인 1919년 4월 11일. 한국을 대표하는 29명 의원의 눈빛은 결연하다 못해 처연해보였다. 이윽고 김신부로 거리엔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한다"는 외마디 선언이 메아리를 쳤다.
상해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기념 사진(사진=국사편찬위원회)
무명은 잠시 빠졌던 몽상에서 깨어나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이라고 두 눈을 질끔 감았다 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글 싣는 순서 |
① 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