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에 기반해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가 중국내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를 앞세워 내러티브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편집자주]글 싣는 순서 |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
임시정부 이동 피난 목선. 진강에서 임시정부 식솔 3백명이 목선을 타고 장사에 도착했다.
중국의 대일전선이 남경에서 급히 후퇴했다. 임시정부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요인들에게 소식을 넣어 남경으로 집결토록 했다.
나와 김구 선생을 비롯한 100여명의 임정 식구들은 목선 한 척을 빌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장사에 도달했다.
전쟁의 여파로 갑작스럽게 장사로 옮겨오느라 단체 숙소를 구할 수 없었다. 우린 각자 방을 얻어 생활했고 고생도 심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장사에서의 생활에 이내 만족하는 듯 했다.
"우리 선전 등 공작도 유력하게 진전이 되고 있고, 경제 방면으로는 이미 남경에서부터 중국 중앙에서 주는 매월 다소의 보조와 그 외 미국 한인 교포의 원조가 있으니 우리는 '고등난민'의 자격이 아니더냐"
김구 선생은 한결같이 힘든 현실을 껄껄 웃어 넘겼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안정감도 잠시, 임시정부의 짙은 먹구름이 끼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김구 선생이 장사로 정부를 옮겨온 그해 5월, 그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 3당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던 남목청으로 향했다.
주요 인사들이 모여 연회가 시작될 즈음 조선혁명당 소속인 이운한이라는 작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요인들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급히 책상 등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네 발의 총성이 더 들렸고 정적이 찾아 왔다.
세를 살피니 이운한은 도망가고 없었다.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 김구 선생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와 하급관리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주요요인들을 인근의 상아의원이라는 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김구 선생은 병원 이송 직후에도 혼수상태가 이어져 의사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 까닭에 병원 입원 수속조차 밟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의 뜻인지 끊길듯 하던 숨이 네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김구 선생의 치료를 요청했다.
이운한에게 남목청에서 저격당해 상아의원에 입원한 김구선생 (사진=부산시립박물관)
이후 큰 수술 몇 번을 거치고 김구 선생은 의식을 회복했고, 기적적으로 위중했던 병세가 낫기 시작했다.
문제는 장기간 이어진 병원 입원으로 궁핍해진 우리의 주머니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당도했다.
국민당의 장개석 선생이 3000원이라는 거금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다. 덕분에 병원비는 물론 퇴원 후에도 김구 선생의 몸조리를 살뜰히 살필 수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운한을 체포해 옥에 가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탈옥했다. 이운한의 범행은 미궁속에 빠졌다.
항간에선 조선혁명당에게 떨어지는 생활비가 부족해서 앙심을 품었다고 하는 설과 이운한이 일본의 밀정이라는 설들이 돌았지만 정확한 경위는 알 길이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중국군의 대일전선은 날이 갈수록 후퇴일로였다. 일본군이 호북성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가 머물던 장사에도 위기감이 감돌았다. 마침내 일본군은 장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번 더 이동을 감행했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