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동해 기곡마을을 찾은 이춘애(59)씨가 흔적만 남은 주방에서 집기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사진=김태헌 기자)
강원 산불이 할퀴고 간 6일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기곡마을의 폐허가 된 한 집. 하룻밤을 시내에서 묵고 돌아온 이춘애(59)씨는 주방에 한참 앉아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숟가락을 매만지더니 이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부모님께서 목숨을 건진 건 다행이지만 모든 게 타버렸어요. 40년이 넘은 집인데 막막하죠. 아들과 딸, 손자들이 삼삼오오 돈을 모아 장만한 싱크대, 그리고 40년 넘게 걸려있던 가족사진 액자가 모두 탔습니다. 거실 한구석 도자기에 둔 김치와 쌀도 없어요"
이춘애씨는 강릉 옥계 산불 소식이 들렸던 지난 4일 기곡마을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뉴스마다 초속 20m 강풍에 산불 확산을 경고하던 상황이라 언제 부모님 집까지 덮칠지 몰랐다.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건 먼저 도착한 동생 이창우(50)씨였다. 그때 부모님은 마을 대피 방송이 나오던 중에도 수돗물을 뿌리며 불길과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이쪽에 물을 뿌리고 있으면, 곧바로 불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붙어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곧바로 끌고 나왔습니다."집은 삽시간에 포탄을 맞은 것처럼 모두 무너져내렸다.
홍득표(80)씨도 이번 불로 평생을 살았던 집을 잃었다. 아내와 아들 내외, 손주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았었다. 나무 기둥만 덩그러니 남은 집을 보던 홍씨는 "다른 식구들은 생업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망상초등학교 임시 대피소 모습. (제보사진)
◇근처 임시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헛기침·한숨소리만 가득마을 옆 망상초등학교엔 이번 불로 집을 잃은 23명이 피신해 있다. 소강당에 가지런히 텐트 9개가 펴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한숨과 헛기침 소리로 텐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망상동에 사는 한의석(62)씨는 "경남 진해에 사는 딸이 옥계에서 불이 난걸 보고는 아내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며 "아내가 나를 깨워 함께 대피했다. 뒷산에서 불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고 말했다.
조경업을 하던 한씨는 45년 동안 살던 집과 나무 1000그루를 이번 불로 잃었다. 한씨는 5년 전 아버지를 수목장한 소나무도 불에 타버렸다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허탈함과 삶은 별개다. 먹고 자는 문제가 가장 크다. 망상초에 있는 23명은 건물 밖 20m 거리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 김신통(86·여)씨는 화장실에 갈 수 없어 텐트에 요강을 들였다. 전날 오후 6시쯤부터 화장실을 참은 할아버지도 있었다.
즉석밥은 있는데 전자렌지가 없어 먹지 못해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기도 했다. 강원 동해시 관계자는 "인근 식당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고 밝혔다.
이번 불로 생긴 이재민은 강릉과 동해에서만 130명이 넘는다. 이재민들에게는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거처가 우선 제공된다. 동해시 관계자는 "이재민은 최장 1년까지 컨테이너에서 살 수 있고, 이후 집을 다시 짓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컨테이너는 불에 탄 집 근처에 놓인다. 이춘애씨는 "자식들은 잠깐 와서 보고 가면 잊히지만, 컨테이너에서 계속 살아갈 부모가 걱정"이라며 "매일 불에 탄 집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지 모르겠다. 화병에 걸릴 것 같다"고 고개를 떨궜다.
정부는 다음주부터 피해조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보상 절차를 진행할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일 강원 영동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해당 지역의 피해시설 복구와 수습, 피해 주민 생계 안정 지원 등 모든 경비가 지원될 전망이다.
강원 강릉 옥계면 천남리에서 집을 잃은 주민이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김태헌 기자)